권민호 Kwon Min Ho
꺼지지 않는 불꽃 — 권민호의 도면
권민호가 그리는 한국 근현대 풍경화의 주인공은 건축물이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에 따르면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다시 자본제로 생산양식이 변하면서 그리스 로마의 서사시도, 중세의 패널화도 사라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거에 대한 인간의 수요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건축술은 절대 중단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예술 양식과 달리 집단적 방식으로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의 원형이기도 하다. 계속 이어진 건축물에는 익숙함 (habit)이 있고, 익숙함으로 인해 무심코 주목하는 과정에서 시각이 아닌 촉각적으로 예술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더 이상 몰입하는 예술이 기능하지 못하는 자본제의 예술 수용방식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건축물을 통해서 관조에 의한 시각적 감각으로는 볼 수 없던 것을 촉각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천〉에서 흔하디 흔한 지방 도시의 낡은 상가건물이나 작가가 병치해놓은 간판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던 마산자유무역지역에서 일하던 여공의 하루를 촉각 할 수 있다. 그리고 〈회색 숨〉에 등장한, 산만하게 병치된 이미지 다발 속에서 연초제조창의 땀 흘리는 노동자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권민호의 작업이 건축물의 도면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도면의 형식이라서 고찰의 대상을 건축물로, 그리고 다시 장소로 확장하고, 이러한 확장을 통해 건물과 건물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촉각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꺼지지 않는 불꽃 — 권민호의 도면> 中
이애선 (홍익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