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성 Bae Joonsung
평론
'배준성의 뮤지엄 시리즈' 중 일부 발췌
이지은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1. 관람자

눈앞의 그림(The Costume of Painter-museum H, A.tadema womens)은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 Hermitage Museum)의 어느 전시실 모습이다.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방안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인다. 벽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 틈에서 유독 한 여성이 천정을 응시하고 있다. 천정화는 로렌스 알마-타데마(Lawrence Alma-Tadema, 1836-1912)가 그린<암피사의 여인들 The Women of Amphissa>(1887)이다. 그림은 플루타르크(Plutarch)가 남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커스 축제를 즐기던 여인들이 암피사의 한 저자 거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당시 포시스(Phosis)와 전쟁 중이던 암피사는 치안이 어지러운 위험구역이었다. 그림은 쓰러져 잠든 여인들이 혹 군인들에게 몹쓸 일을 당하지 않도록 마을의 아낙네들이 이들을 보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미담으로 보여지는 이 일화는 실제로 그림에선 그다지 교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대의상을 입은 여인들의 매혹적인 포즈는 화가의 관심이 역사가 아니라 고대에 대한 19세기의 낭만적 상상에 다름 아님을 말해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것은 알마-타데마의 작품이 아니다. 배준성의 <화가의 옷>시리즈의 렌티큘러다. 하늘거리는 그리스 의상 속에 드러나는 몸은 동양인의 누드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이를 바라보는 여성 역시 동양인이다. 그녀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풍경일까 아니면 그 아래 자리한 동양인의 몸일까?

이 그림은 배준성의 신작 뮤지엄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감상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미술관을 둘러보는 다른 관람객과 구분되어, 동양인 여성의 눈은 천정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는 천정의 렌티큘러 못지않게 이 여성의 시선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녀의 ‘바라보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어느덧 그림 속의 그녀와 나를 동일시하여 배준성의 렌티큘러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그녀는 에르미타주에 있었던게 아니다. 배준성의 렌티큘러 역시 그곳에 없다. 작가는 늘 그랬듯이 이미지를 합성하여 새로운 맥락을 생산해낸다. 작가가 드리운 이미지의 층이 여러 겹으로 겹쳐질수록 이 작품의 여성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얼떨결에 내뱉은 말실수가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듯이, 작품을 바라보는 여성의 도드라진 시선은 이제 배준성의 관심이 작품과 관람자와의 관계로 옮아갔음을 지적한다. 그림은 작품과 관람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전시장을 정물화한다.

관람자에 대한 배준성의 관심과 배려는 꾸준했다. 스스로가 화가이자 서양고전회화의 열성적인 관람자인 작가는 누구보다도 보는 즐거움에 민감하다. 신고전주의 화가인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나 도미니크 앵그르 (Dominique Ingres), 미국출신의 상류사회 초상화가인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나 낭만적 고대 세계를 즐겨 그리던 알마-타데마(Lawrence Alma-Tadema)같은 서양화가들은 배준성에게 김홍도나 신윤복 이상으로 친근한 존재들이다. 여기서 새삼스레 작가의 관심사에 대한 한국성 논의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상정하는 ‘우리 것’이 작가에게 ‘과거’라는 시공간에 머문다면 배준성이 늘 들여다보는 서양미술가들의 화집은 지금 이 순간 화가의 곁에 놓인 정물이다. 67년생, 이른바 386세대의 하나인 그가 80년대 중반 서양화를 전공하는 미대지망생으로 입시관문부터 마주친 것은 관음보살 반가사유상이 아니라 아그리파와 비너스의 흉상이었다. 유화를 배우며 배준성이 들여다 본 화집들은 바로 서양의 마스터들이었다. 표현의 정교함과 생생한 색채에 감탄하기보다 작가는 이들의 작업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배준성이 그림을 보는 방법은 곧 그림을 더듬어 그려보는 것이다. <화가의 옷>비닐 시리즈가 그것이다. <화가의 옷>에서는 그리기에 앞서 늘 감상의 과정이 선행된다. 그림을 소화하려면 작가의 말대로 작품의 맛있는 부분을 극대화하는 “꿀 바르기”가 먼저이다. 배준성에게 그 맛있는 부분은 화가가 묘사한 옷이었다. 초상의 얼굴 부분이 모델에 의해 제약받는다면 옷이나 장신구는 작가의 재량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매끈하게 처리되는 두상과 달리 의상은 화가의 과감한 붓질이나 옷감의 질감묘사, 장신구의 광택 등을 통해 그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원작의 모델 포즈와 비슷하게 준비된 누드 사진 위에 비닐을 얹고 잔뜩 눈독을 드린 이 부분을 옮겨 그린다. 그리곤 군침이 돈 혀끝을 이리저리 굴리며 옷 주름 사이사이의 꿀맛을 음미한다. 감춰진 속살이 드러나듯, 반 다이크(Van Dyck), 베르메르(Jan Vermeer), 워터하우스(Waterhouse)의 그림들은 스케치부터 채색의 과정까지 들춰지고 해체되어 배준성의 혀끝, 아니 작가의 붓질에 의해 다시금 덮여진다. 이렇듯 작가가 가려놓은 제작의 과정들은 비닐 작품의 특성상 다시 관람자에 의해 벗겨진다. 익숙한 서양고전그림의 의상을 들추면 드러나는 동양인의 몸.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발견되는 의외성과 생경함은 시각을 교란시키고 그림의 맥락을 뒤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