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선 Park Bosun
'존재의 풍경 : 일상의 틈에서 피어나는 감정적 풍경' 중 발췌
인간은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살아간다. 텅 빈 공간이다. 그 구멍은 때로는 고요하 고 깊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존재하지만, 때로는 메워지지 않는 상처로 변해 아프고 쓰리게 한다. 사람 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고, 혼자 있어도 온전한 평온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구멍 때문일 것이다.

박보선은 바로 그 마음속의 빈 곳, 그 공허한 감정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커다 란 불안과 공허를 지녔음에도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다. 현대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 구멍처럼 존재하는 공허와 불안은 어느 순간 증식해 그 존재 자체를 삼킨다. 그로 인해 자신이 세상에 서 사라져 버린 듯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사라져 버린 자아를 투명하게 그렸다.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이러한 은밀한 슬픔을 껴안고 평범한 일상을 평온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그 평범한 일상 도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감정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르게 펼쳐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세상의 모 든 존재는 모든 시간을 관통하며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존재의 상실에서 시작된 박보선의 작업 은, 그 상실을 품은 채 각자의 삶을 평온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에 다정하게 닿았다.

존재의 상실과 익명성: 존재의 불가능성과 복수성

박보선은 현대인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익명성을 상징하는 픽셀화(mosaic) 기법과 일 상적 풍경을 섞어 표현한다. 이러한 작업은 대학 시절 경험한 인간관계의 소외와 심리적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당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해지는 경 험을 했다. —“내가 분명 여기 있는데 없는 사람 같았다.”(작가와의 인터뷰)— 이러한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상태를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게 했고, 외형만 남기고 본질을 공백처럼 지우는 방식 으로 구체화됐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인물 부위를 어도비 포토 샵 프로그램의 ‘투명 격자(Transparency Grid, 회색-흰색 체크무늬)’ 형식으로 채움으로써 비어 있음 을 암시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인물이 없는 것처럼 인물을 그리지 않고 그 공간을 배경이 투과된 것처럼 그리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이 중 전자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작가는 포토샵 프로그램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존재의 삭제, 혹은 증발을 표현할 때, 포토샵에서 빈 부분(투명한 영역)을 나타내는 ‘투명 격자’의 표현 방식을 차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러한 시도는 <부재>(2019), <짧은 대화>(2019), <어슴푸레한 걸음>(2021)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인물의 본질적 특성을 제거하고, ‘투명 격자’로 채워진 인물 표현은 외형의 흔적만을 남김으로써 존재 론적 상실과 공백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작업을 처음 구상할 당시 느꼈던 정서를 가장 강력하게 시각 화한 작업은 <부재>다. 이 작업은 한 침대 위에 있는 두 인물이 각자의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모습을 통 해,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적 소통은 부재한 현대인의 관계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라 진 존재를 포토샵의 ‘투명 격자’로 표현한 이 작업들은 이후 익명성을 의미하는 픽셀화 방식으로 나아 가는 토대가 되었다.

동일한 크기의 정사각형들이 모여서 형상을 이룬 ‘투명 격자’와 ‘픽셀화’는 형태상 유사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데, ‘투명 격자’의 경우, 존재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반면, ‘픽셀화’는 익명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사라짐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태(존재의 불가능성)를 뜻 하지만, 익명성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복수적 존재의 가능성(존재의 복수성)을 내포한다. 박보선의 작업에 등장하는 개인이 ‘투명 격자’에서 ‘익명성’으로 변화한 것은, 그 의 개인에 대한 시선이 부정적 관점에서 긍정적 관점으로 전환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작가의 발언을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우울한 상태가 어느 정도 해소되고 나니까, 예전처럼 작업을 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졌어요. 감정적인 변화가 그림에도 영향을 주더라고요.” “이전에 ‘부재’와 ‘우울함’을 이야기했 다면, 이제는 일상으로 방향을 옮기고 있어요.”(인터뷰) 박보선은 2019년 즈음에 자신의 깊은 우울감 을 작업의 핵심적 주제로 삼았으나, 이후 익명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였고, 2020~2021년에 심리 적으로 회복되면서 밝고 따뜻한 색감을 사용하여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 했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의 변화는 그의 미학적 표현 방식의 전환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진국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