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인 Kim SangIn
포토부스PHOTO BOOTH - 작가 김상인의 2024년 상반기 공개작에 대한 소고
과거는 인식될 수 있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로만 포착될 뿐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W. 벤야민

그것은, 생각만큼 흔하다.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다. 사로잡으려 한다. 사로잡지 못한다.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을 드러낸다. 고정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맥락 없이 대상화하며 남는 것은 자기-자신이 아닌 타자이다. 그것의 외부는 기능적이다. 내부는 은밀하다. 그것은, 교환을 중재한다. 인과 안에서 무언가를 받고 무언가를 내미는 그 사이 아득한 심연이 있다. 포토부스, Fantastic-realistic machines.

시각작가 김상인이 <포토부스PHOTO BOOTH>라는 제목으로 제시한 열다섯 점의 그림을 하나의 개념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정면성’일 것이다. 김상인의 그림 속 요소들은 언제나 정면을 의식한다. 그 시선은 응시적凝視的이다. 응시는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에 있다. 의심이다. 의심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은 그림을 보는 ‘누군가’이다. 의심에는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이는 그림을 보는 바로 그 ‘누군가’이다. 김상인의 그림 속 인물 동물 사물들은 정면의 응시를 통해 ‘누군가’를 바라본다. 텍스트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것들은 적힘으로써 정면성에 복무한다. 그 기표가 무엇이든 그것의 기의 는 그림의 시선이다. 기호들은 서로 엉키어 고유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그 의미에서 탈출하여 하나의 의도를 갖는다. 그 의도는 본질적 의문으로 수렴된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 신은 무엇을 경험을 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김상인의 텍스트-이미지에서 의미를 도출하려는 노력은 무망하다. 읽으려 하지 말 것. 해석하려고 하지 말 것.

한편 이미지 속 ‘정면성’은 소리를 지운다. ‘봄see & saw’. 그리하여 ‘소리-없음’. 김상인의 이미지에도 김상인의 이미지를 보는 ‘누군가’에게도 소리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응시는 대화face-á-face가 아니 다. 응시는 침묵의 실천이며 교환이다. 응시가 드러내는 질문은 언어(소리)의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질적이다. 김상인의 열다섯 점 그림은 기필코 반드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실천은 침묵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어(소리)를 무념화한다는 뜻이다. ‘소리-없음’. 그것이 이미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이며 관계이다. ‘소리-없음’ 중에서 ‘사실’과 ‘사실적’은 분간된다. ‘사실’은 경험 이다. ‘사실적’은 재현이다. 김상인의 이미지들은 경험을 추구한다. 재현은 사적인 단계에서 해체된다. ‘정물화靜物化’, 정물로의 추구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축소되고 확장되고 덧붙여지고 적힌다. 기억의 구球, 원형圓形은 이론이 아닌 경험의 재구성에서 촉발된다는 점에서 김상인의 이미지는 입체적이나 입체의 정의 바깥에 위치한다. 거기 있는 것은 현재의 이미지이다. 작가의 경험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동안 그 중심이 되는 것. ‘누군가’의 보편 경험에 다가가는 것. <포토부스PHOTO BOOTH>의 작가와 작품과 보는 이를 중재하는 중심, 구조 혹은 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미지 속 무언가를 구성, 혹은 구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이다.

Photo Automat 그리고 PHOTO BOOTH의 사건. 닮은 것. 그러나 다른 것. 일시 정지. 그것은 흘러가 버린다. 번쩍거린 몇 번의 빛과 함께.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은 ‘그것이-존재-했음ça-a-été’을 드러낸다. 김상인의 이미지 또한 그렇다. 다만 김상인은 횡을 거부하고 종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도발, 정면과 정지를 드러내기 를 설명할 길이 없다. 김상인은 감정과 감각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던진다. 그 낌새는 그림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완성하는 것은 그림 앞에 선 ‘누군가’이다. 그것이야말로 photoautomat 혹은 PHOTO BOOTH, 자동 사진기계의 사건이다. 김상인의 이미지는 글썽이는 감정은 배제한다. 사랑이나 슬픔, 온기과 공감 등의 교류를 표현하는 클리셰의 삭제다. 느닷없는 가면(진지함), 뜻밖의 형태를 가진 모자로 대표되는 유머는 그로부터 발생한다. 가장 희극적인 장면을 푸른빛으로 정리한다든가(「베를린 몽키 바에서 촬영중인 모델들」), 열정을 납빛의 색으로 가둔다든가(「몽키 바에서 만난 모델」 「몽키 바에서 만난 포토그래퍼」), 사랑으로 가득한 내면 이외의 것을 밝은 노란색으로 처리하는 것(「르코르뷔지에 아파트에서 자고 일어난 우리」), 마주하지 않는 연인을 담은 온천수의 발랄한 기포(「그린데발트 글레이셔호텔 월풀에 들어간 우리」) 등은 일종의 역설이다. 보기 좋음을 넘어서는, 저 안쪽 깊숙한 곳으로의 파고듬. 미술의 원시적 의지를 작가는 화려함과 강렬함 속에 감춰둔다. 이를테면 우리는 「빌라 사보아에서 생각에 잠긴 나」에서 뜻밖의 내면을 마주친다. 두 사람이 있다. 장소는 불분명하다. 저녁의 어스름이 그림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저녁 그림자에 뒤덮인 푸른빛의 건물 외벽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두사람의 얼굴이다. 여자의 얼굴은 빨갛다. 손도 귀도 빨갛다. 그 붉은 빛은 너무나 선명하여 곧 사라질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부재했는지도 모른다. 거기 묘사되었지만 존재한 적 없음. 남자의 파란 이마와 사라질듯한 수심 가득한 눈은 부재를 증명하는지도 모른다. 안으로 침작하는 명징한 사실. 존재는 하나라는 것. 둘이 될 수 없다는 것. 시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이 그림이 마음을 뒤흔드는 근거는 외부에 없다. 내부에 있다. 이 그림의 정면은 그림을 들여다 보는 ’누군가‘의 마음이다.

이번 공개작의 정점은 「베를린 몽키 바에서 촬영중인 모델들」이다. 베를린의 MONKEYBAR에서 있었던 촬영회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여섯의 인물들이 상징적인 페르소나를 드러내며 모여 있다.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자욱한 중에 이들의 모습과 동작은 연기적演技的이나 위화감 없이 어우러진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조화로워서 생생하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타자의 대상화가 아닌 대상의 타자화. 이들은 일종의 언어 게임을 하고 있다. 규칙은 침묵이다.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감각이다.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채(그 누구도 자신의 역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한다(더없이 입체적이다). 어떠한 강제도 없이 신비스러운 덩어리를 이룬다. 작가는 발생하려는 의미를 제한한다. 남은 몫은 그림을 보는 ‘누군가’의 것이다. 이 ‘무대’를 우화적이라 할 수 있는가. 몽환적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은 아예 들지 않는다. 작가는 어떠한 의도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김상인은 그림으로 소략하지도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림으로 꿈을 꾸지 않는다. 그림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김상인은 김상인을 그린다. ‘본 것’ ‘있었던 일’ ‘거기 있던 혹은 있어야 했던 사람’을 그린다. 그는 시간과 장소의 일방향을 거절한다. 우연이 필연으로 엮이고 그것이 다시 새로운 현상으로 제시되 는 반복과 반복, 뒤섞음과 뒤섞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독창적인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음악은 흐름으로써, 시는 텍스트의 몸을 가짐으로써 소유를 거절하듯 그림은 잠시 드러났다 사라진다. 붓으로도 색과 형으로도 고정시킬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을 보는 ‘누군가’의 내부로 힘껏 도약하는 일이라는 것을 작가 김상인은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유희적이다. 그리고 필연적인 실패이며 눈부신 시도이다. 2유로, 혹은 5달러를 넣고 PHOTO BOOTH 속 의자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을 짓고 잠시 멈춰있는 것처럼.

_유희경(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