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래 Kwon Yong-Rae
냉정과 열정, 빛과 그림자
그 사이 어디쯤

예술가는 평범함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 나간다. 권용래 작가에게 이 발견의 출발점은 바로 ‘빛’이었다. 빛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고 마침내 닿을 수 있었다. 여기서 빛은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정확하고 사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움직이며 변화한다. 권용래 작가는 이 일렁이는 빛을 따라 한참을 걸어왔고 지금 잠시 머무는 중이다.


빛을 찾아 떠나는 긴 여정

권용래 작가의 작품은 빛이 있을 때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캔버스 위에 작은 금속 조각들을 붙여 놓은 것 같다. 그런데 빛이 닿는 순간, 이 작은 금속 조각들은 형태와 색감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차가운 느낌의 금속은 빛을 만나 따뜻하게 물결치고 제 각각 고유의 빛깔을 발산한다. 그는 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 내기 위해 반복되는 작업을 수십 번 수백 번 계속한다.

“누군가는 설치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요, 회화에 기반한 작업입니다. 회화의 확장이고 연속인 셈이죠. 전통적인 물감과 붓 대신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을 사용합니다. 먼저 캔버스에 젯소를 칠해 표면을 매끄럽게 정리하고 그 위에 수많은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을 붙입니다. 이 유닛을 만드는 과정이 무척 고되죠. 유닛의 평평한 표면을 망치로 두들겨 구부러뜨리고 그 위에 안료로 색을 입힙니다. 물감을 묻혀 붓질을 하듯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을 다듬고 칠해 캔버스 안에 가득 채우는 겁니다.”

이렇게 인고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캔버스에 빛이 드리우는 순간, 완결된 작품이 된다. 그의 작품은 빛 아래서 밝혀 지고, 그의 작품에는 자신의 기억과 경험, 의미와 관념이 중첩되고 확장되면서 하나의 형상을 이룬다.

서양화를 전공한 권용래 작가의 이전 작품은 지극히 회화에 충실했다. 붓의 터치를 강하게 혹은 약하게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그런데 작업을 지속하면 할수록 피로감과 회의감이 들었다. 작업실에 작품은 쌓여만 가는데 자신은 붓과 물감에 붙잡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걸 버리면 무엇이 있을까? “지금까지 다루었던 방식을 벗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들이 계속 쌓여갔다.

“작업실은 보통 지하에 위치하곤 해요. 조용하고 저렴하고, 그렇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셈이죠, 참으로 역설적인 건 지하의 어둠 속에 들어가면 그제서야 빛이 보입니다. 밝은 데서는 인식하지 못했던 존재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의 아이디어도 여기서 얻었습니다. 지하 작업실 틈으로 들어온 빛이 구겨진 은박지 조각에 반사되어 흩어지는데, 지금까지는 빛에 의해 드러낸 형상을 그렸다면 이제는 빛이 만들어낸 현상에 집중하자 싶더군요.”


변하지 않기에 변화할 수 있는

권용래 작가가 현재의 스테인리스스틸유닛에 정착하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다. 은박지에서 시작해 깡통 뚜껑, 알루미늄 조각 등 적합한 재료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다가 변하지 않는 스테인리스스틸을 주목하게 되었고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레이저 컷팅해 다량의 유닛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물감과 붓으로 하는 회화 작업은 작품 보관이 여간 까다롭지 않아요. 장마 때 가 되면 작업실에 물이 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온도와 습기에 늘 예민하죠. 그런데 스테인리스스틸 유닛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유연성이 생겼어요. 간혹 작품이 손상되더라도 교체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서 다르게 재배치도 가능하죠. 변하지 않는 스테인리스스틸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변화와 변주가 가능 합니다. 그래서 영원해질 수 있는 거죠.”

그의 작업실은 공구로 가득하다. 스테인리스스틸 표면을 다듬기 위한 망치부터 압력을 가하고 절단하는 기계들까지 여느 작가의 작업실에 비하면 거칠고 무겁다. 그렇게 이곳에서 단련된 스테인리스스틸은 빛을 만나면 불꽃으로 타오른다. 그의 작품 ‘The Eternal Flame’, ‘Light in Light’는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은은하게 공간을 채운다.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빛의 ‘반사’를 통해 일어나는 ‘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리플렉스(Reflex)와 일루전(Illusion)이 키워드라고 할 수 있어요. 색채와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면서 하나의 메시지에 다가가는 것이죠. 조각이 물질을 다루는 일이라면 회화는 본질을 표현 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스테인리스스틸의 냉정이 열정으로, 빛의 밝음이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지게 하고자 합니다.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개념들이 부딪히면서 발산하는 에너지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무한하고 지루한 과정 끝에 도달하는 궁극의 즐거움

예술은 창의적인 작업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예술가들에게 물어보면 한결같이 반복적이고도 성실한 노동이라 답한다. 권용래 작가 역시 한눈 팔지 않고 작업만 해야 그나마 자신이 목표한 어느 지점에 도달한다고 강조한다.

“10년 넘게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 데, 작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이래서 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업에만 몰두해도 될까 말까 한데, 더욱 작업에 매달리자 싶었어요.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작업은 지루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과정을 계속하는 건 마지막 순간 때문이죠. 어떤 작품이 탄생할까 저 역시 궁금해요. 그 두근거리는 설렘이 오늘을 버티게 하는 거죠.”

권용래 작가의 작업실에는 당구 테이블이 놓여 있다. 실제 당구를 하는 건 아니고 그 위에 커다란 상판을 올려 책상으로 사용한다. 지인에게 받았을 땐 작업 틈틈이 당구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손이 가지 않더란다. 그래서 지금은 일하기 좋은 넓은 책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업에 영감을 얻으려 멀리 여행가고 그런 일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작업실을 오가며 골목을 산책하는 그런 일상적인 행위들이 작품 속에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저 작품은 어떤 풍경을 담은 거냐, 이렇게 물으면 명확하게 한 장면을 콕 짚어서 말하지 못해요. 은행잎 떨어진 길과 착륙하던 비행기에서 바라 본 창밖 도시, 작업할 때 한동안 들었던 음악의 정서 같은 것들이 조형적인 언어가 되어 차곡차곡 쌓인 거죠.”


아름다움에 대한 끊임없는 명상과 탐구

“나의 작품은 평면을 바탕으로 한다. 그 위에 다운라이트에 의한 빛과 그림자로 형태를 부여한다. 나에게 있어 작품이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말처럼 어둠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적당히 그늘을 만들고 고즈넉한 음예의 무늬를 드리워서 그 위에 불꽃의 일루전을 연출하는 것이다. 빛의 물리적인 아름다움이 그 신비로운 속살을 드러낼 때 밤과 낮 그사이 내가 있다.”

권용래 작가는 2016년 서울 금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빛의 정원’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아름다움은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음예(陰翳)의 무늬 명암에 있는 것이다”라는 글귀에서 자신과 같은 고민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의 작품은 명상적이고 탐구적이다. 즉 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게 하고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쉽지 않고 때로는 고독하기조차 하지만 그는 이 과정을 오래도록 이어갈 작정이다. 무엇이 보일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오래도록 빛을 따라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권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