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Lee Jae-Hyun
평론
기억을 더듬는 ‘내적 풍경’

홍경한(미술평론가)

1. 작가 이재현이 그려낸 공간 속 장면들은 실체의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에 관한 매개로 자리하고, 그 내부에 존재하는 인물들과 각자의 누군가로 의인화된 동물 및 사물들은 주체를 보다 존재답게 하는, 현실에 대한 탈 영역화의 주요 요소이다.

그의 작업에선 화려한 색깔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행복과 슬픔, 성취와 상실이 섞인 불안한 색이다. 망막으로 받아들이는 색과 본능적으로 읽히는 색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달동네에서 살던 유년 시절의 기억 과 어른이 된 오늘의 현실을 텃밭으로 한 존재의식이 배어 있다.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제작된 그의 회화는 자유로운 선과 거칠고 일그러진 형상들로 가득하다. 쓸쓸함과 무거움을 안은 채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작품들은 과거의 기억을 포박한 비물질이자, 물질인 시각 이미지, 내면과 외부의 관계를 관통하며 완성된다. 일차적으론 색에 의한 분위기에 기울지만 선과 형상은 속박의 흐름과 귀속에 관한 의지의 충돌을 조화롭게 보여준다.

일례로 (2021~) 연작을 포함한 (2021~) 시리즈, 그리고 (2021~), (2023) 등의 작품은 기억과 현재의 일상에서 건져 올린 어떤 것들에 상상을 덧댄 것들이다. 그 그림 속 주인공들은 행위, 시간, 공간, 사물, 삶이 복잡하게 관계하고, 이는 실체적 타자와 또는 자기 안의 타자와의 대화, 독백을 통해 스토리를 구축한다. 이러한 경향은 (2023)을 비롯한 (2022~) 등의 작업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목욕을 하거나 대화를 하고 무언가 즐거운 파티처럼 보이는 장면들과 더불어 각자의 삶의 정상을 향하는 인물들에선 하나이자 전체이고, 전체로서의 공간과 개별의 작품이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를 갖는다. 시니컬한 듯, 무관심한 표정의 인간들과 사물이 서로에게 공생‧공존하며 얽히고설켜 일체화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대한 짙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특히 (2023)에서처럼 비와 사람, 어른과 아이, 현실과 상상 등의 경계를 다루지만 그 안에는 절제된 규칙과 자유로움, 작위적인 것과 무작위적인 것, 이성과 감정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두드러진다는 게 특징이다. 연작에선 침잠되어 있던 기억의 단락이 깊은 내레이션이 되어 토해진다.

2. 2020년부터 2023년 근래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의 많은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 복제’에 가깝다. 작품 내부에 똬리 튼 존재, 삶의 궤적과 연관된 스스로의 고찰은 지난 세월이 남긴 가시적 표상과는 또 다른 의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색과 형상의 일렁임으로 잘 읽히지는 않을 수 있으나 실제로 작가는 구상적인 화법을 통한 존재로서의 자각에 무게를 둔다. 여기엔 인간이란 항상 세계 내 존재라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실내든 실외든 마찬가지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아온 궤적의 연장선상에 놓인 이들 작업은 실존을 되묻지만 역으로 타자에 의한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이면서 현실적으론 강인한 삶의 의지 문제와 맞닿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작품에 자주 출연하는 봉제 인형 ‘베티’, ‘한나’, ‘토마스’ 등이다. (2021), (2021), (2022), (2023) 등에서 고루 새겨져 있다. 과거 중동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출장 중 어린 작가에게 준 선물이다.
이 인형들은 하나의 오브제로, 사람의 손에 들린 채로, 화면 어딘가 위치하며 번번이 그려진다. 헤지고 낡아 다시 꿰맨 인형을 쥐고 있는 장면에선 작가가 얼마나 그 인형을 아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때는 몰랐겠으나 인형과 친구로 함께하며 지낸 시절이야말로 존재에 관한 의문이 엄습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돼지 껍데기로 만든 아버지의 서류 가방을 포함해 욕조 등도 이재현 작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인형들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예술가 이재현에게 예술이란 기억의 호출이면서 현존재(Dasein)에 관한 담담한 일기이다. 오늘을 비추는 장치들이다. 고객들마저 모두 떠난 골프장에서 잔디를 깎는 사람, 욕조에 발을 담근 채 두 손엔 가방과 동물을 들고 있는 남자,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단란한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남녀(House on the hill, 2023) 등에서 그러한 흔적들은 발견된다.

이들 작업은 화면에 기록되고 채워지는 회화적 탐색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한 부분으로, 흡사 그림일기와 같다. 그렇게 그는 예술로 ‘거기(Da) 있음(sein)’으로 현존재임을 확인한다. 동물과 사물, 또 다른 사람을 통해 타자를 통해 그곳에 있었음을 되묻는다. 이렇듯 이재현의 작품들은 지금의 존재성과 관련이 있다. 삶의 과정에서 접한 일상의 사건들, 기억들 역시 존재를 포용한 실존 이라는 명사이다.

물론 이재현에게 존재와 실존의 간극은 구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부에 안착된 요소들은 그렇지 않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돛단배에 의지한 채 서 있는 남녀를 그린 (2021)를 포함해, 시리즈, 연작 등이 그러하듯 낱낱의 풍경, 그 각각의 장면들은 거기, 여기 있다는 ‘내적 풍경’을 엿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존재인 그는 삶에서 건져 올린 상황과 상태를 통해 예술의 싹을 틔우며, 조형은 그것의 드러남과 감춰짐의 틈에서 움튼다. 이는 일종의 잠재적 운율로, 드러남과 감춰짐은 상보적 작용을 거쳐 작품 내에 뿌릴 내린 채 이재현 작업만의 성격을 형성한다. 그 성격이란 바로 집약된 ‘삶의 결’ 이다.

3. 예술은 삶의 결을 산포하는 도구이면서 존재에 관한 의미를 담아내는 거푸집이다. 그의 회화 근작들은 순연의 삶에 의탁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불확실성과 무력감을 이겨내기 위한 긍정적 수용에 가깝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이재현의 작업들은 몸과 정신으로 느끼고 체감한 것들의 반영임을 일러준다. 살며 살아가며 마주한 기쁨과 슬픔, 좌절과 고통, 비애와 환희 등을 미적 거름망을 통해 걸러낸 기억과 회상의 결과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조형의 단초야 고저(高低)를 바탕으로 한 인간 내면에 똬리 튼, 자기만의 심층에 기인하지만 매제의 얇은 망을 뚫고 안착한 형과 투박한 질감, 거친 선, 자유로운 색깔 등은 작가 기억의 이야기를 이끄는, 혹은 현재를 연결하는 수단이자 새로운 회화적 문법을 만들어 내는 생성원리의 구체적 적시 방식이다.(같은 의미에서 금속을 직접 용접하고 도색하여 완성되는 프레임 또한 작품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는 건축과 조각에 전념하다 회화로 넘어오면서 강해진다. 그것은 때로 환상적이다. 하지만 그림은 환상적일 수 있어도 이곳엔 진짜 환상이란 없다. 대신 현실계에서의 결핍과 충족의 갈급함이 사유의 방식으로 서술된다. 일련의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적 갈망, 행복과 자유로 향한 좌표도 배제하기 어렵다.

(2021)과 (2021~)과 같은 일부 회색 작품이 그렇듯 필자는 근작에서 그의 지나온 삶에다 그 너머의 시간을 본다. 그림 속 다양한 오브제는 당시의 기억을 소환하는 도구라는 것, 인물과 동물은 상계동 달동네에 서린 추억과 현재의 단란한 삶을 잇는 매개라는 것, 기타 낱낱의 모두가 창발의 배경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소실점은 ‘나’라는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이 정체성이 작품으로 전치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작가의 모든 작업과정과 결과는 결국 ‘나’를 시점으로 모든 미의식과 표출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나’는 곧 실존과 동일한 분동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 드리운 고독함과 외로움도 실존으로서의 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선 형식 이면에 존재하는 것, 즉 주체를 더욱 주체화하는 생생한 실존의 감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재현의 표상은 감성적 인식에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한다. 이성이라는 수통으로 길어 올린 논리의 문장과도 갈음된다. 그것은 작가와 지근거리에 있는 곳에서 발견되는 일상과 맞닿아 있을뿐더러, 그리하여 생성된 작품들은 아름답게 사유하는 기술, 경험을 통한 관계의 서술에 가깝다. 그리고 결론은 ‘기억-존재-이미지’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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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깔

'The Grey' 전시 서문 - 미술평론가 배혜정


기억의 색은 무엇일까? 기억은 그 생생함을 잃기 마련이어서 순간의 총천연색 실제는 바래고, 기억의 세부들은 흐릿해져 회색 빛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이재현의 'The Grey'전시에서 볼 수 있는 근작들은 기억을 담는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있는 그 무수한 기억들은 이렇게 회색 빛이 된다. 우리는 그 기억의 이미지를 순간의 감정과 정체를 분간할 수 없이 혼재된 상태로 나의 머릿속 어딘가 한구석에 그저 둔다. 그리고 기억의 내부에는 사람이, 사물이, 그날의 나의 정서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런데,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점차 밀려나는 한편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여느 삶을 살아가다 가도 어느 순간 스친 그의 향수가, 문득 마주한 골목의 이미지가, 어떠한 환희가 또는 어떠한 좌절이 내 기억의 서랍 속 장면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억의 사람, 기억의 사물을 그린 작가의 그림은 우리를 닮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넨다. 위, 아래로 비스듬히 놓인 눈, 장난스럽게 올려 붙은 코, 조그만 입. 작가가 그리는 사람은 그렇게 익살 맞으면서도 우리와 닮았다. 이 닮음은 공감의 장치가 된다. 먼저 홀로 있는 이들을 살펴보자.

'Twenty'의 그는 권투 글러브를 낀 채 얼굴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스무 살의 삶이 그랬던가? 법적으로 성인이며, 꽉 막힌 제도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졌지만 아직 스스로 무엇도 할 수 없는 세상에 홀홀 던져진 스무 살. 작가가 그려낸 스무 살의 삶은 상처가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단단히 힘을 주고 땅을 밟아 선 그의 다리는 이 게임의 승자를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Sister’s cotton candy'에서 담배를 문 그의 눈은 퀭하다. 그의 업무용 가방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놓여 있고 그에게는 왠지 위로와 평안이 필요한 듯하다. 지쳐 보이지만 그럼에도 내일의 그는 훌훌 털고 출근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렇게 홀로 있는 인물들 중에서 'On the borderline'이 전하는 기억의 내용과 상기하는 정서는 조금 더 복잡하다. 두 인물은 모두 작은 욕조에 들어가 있다.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들어간 이들은 입은 옷을 벗을 생각도 못한 채 대야와 욕조에 들어가 있다. 시선은 초점을 잃은 듯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가방까지 챙겨 들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데, 반대 손에 인형도 들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옷을 벗을 생각도 못한 채 물에 들어가 정신이 번쩍 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에 경계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건 아마도 우리 삶의 선택의 기로가 그렇게도 무겁고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면의 모티브가 된 것은 어릴 적 옷을 입은 채로 물놀이를 하고 흠뻑 젖기도 했던 작가의 기억이다. 이 기억의 장면을 성인의 모습으로 그리면서 작가는 혼자 노는 아이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성인이 되었음에도 외로움과 두려움은 그대로인 채 삶의 무게는 늘어만 가는 우리들 삶의 모습에 은유하고자 했던 듯하다.

한편, 극적인 삶의 순간, 낭떠러지와 같은 좌절을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은 공교롭게도 'The Painter’s self-portrait' 즉, ‘화가의 자화상’이다. 테이블에 켜켜이 쌓아 올린 사물 위의 그는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줄에 목을 감은 채이다. 그가 디딘 사물들은 작고 연약하고 딱히 무게중심이 분명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자칫 저 줄은 그의 목을 조이고 메달아 버릴 것이다. 깊은 좌절, 깊은 슬픔, 깊은 책임감, 깊은 절망 그리고 죽음. 이것은 우리 삶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렇듯 삶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관객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무엇보다 바랐던 것 같다. 먼저 'Wind, People, See'는 관계에 관해 말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규정되고 목표를 수정하며 타협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한없이 외로운 존재여서 그와 나 사이에는 이어 붙일 수 없는 깊은 심연의 균열이 있고 그녀는 헤드폰을 쓴 채이다. 하지만 제목의 바람과 그들의 시선 방향은 의미심장한데, 같은 바람을 맞으며 같은 방향을 본다는 것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다르고 진정한 공감이 요원할지는 몰라도 함께 바람을 견디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이게 관계가 주는 위안이 아닐까?

'My life goes on'과 'Life goes on'은 그렇게 사람 속에서, 내 경계 안의 사물과 함께 계속되는 삶을 보내준다. 가족, 친구, 연인, 이들은 모두 지지고 볶는 삶 속에서 나를 유지시키고 지켜주는 자들이기도 하며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앞서 화가의 자화상 역시도 무너지기 직전이 아니라 함께 지탱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경계 안에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 대한 그의 공감과 연민을 보여주는 그림은 'People waiting'이다. 저마다 사정도 이유도 다르지만 아침, 저녁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삶의 형태와 지금의 감정, 그가 오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딸이 속을 썩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들. 그렇게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때로 대중의 이름으로 한 데 모인다. 함께 고통을 나누기도 함께 세상에 맞서기도 하는 것이 이 대중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던 시간들, 자신의 기억을 쏟아낸 이 시간들이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이 당신에게도 치유이기를, 순간 순간 꺼내 보는 기억들을 공유하는 사진첩과 같은 것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