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성연화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를 찾다.
많은 작가는 무엇인가 새로운 물질과 조우하거나, 자극을 받거나, 강력하게 충돌하면서 작업을 시도한다. 혹은 독자적인 작업을 위해 과거의 기억을 찾아다니고 의존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많은 작가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얻어지는 작품들을 근거로 ‘기억’이 미술가들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내놓는다.
‘기억’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프라톤은, 인간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의 원형을 인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언급은 매우 피상적이라는 평가다. 이후 데카르트는 부정확성이 수반되는 기억에 대해 간과하고 자아는 기억과는 전혀 무관한 어떤 ‘실체(Substance)’라고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개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기억에 관한 정립을 이어간 사람이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다. 경험주의의 완성을 평가받은 흄은 기억과 인간의 정체성을 관련시킨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연구들에서, “인상의 지각이 우리 정신에 남아 관념이 되고, 그중에서 생생하고 강력함으로 간직되는 것이 기억이다. 그 생생함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기억과 달리 근원적 인상과 동일한 질서와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다. 관념을 자유롭게 유희하는 것이 상상력이다.”라는 논리를 읽을 수 있다.
한편 흄 이후의 앙리 루이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 1859-1941)이 말하는 기억은 정신적 삶이 전개되는 모든 시간 속에서 지나간 과거가 현재의 순간으로 연장되는 정신의 운동이라고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의 반복에서 기억하게 되는 기억에는 ‘습관기억’과 무의식적이고 심층적 기억인 ‘순수기억’으로 구분하였다. 그가 말하는 기억이라는 것은 일상적이고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모든 경험이 역사로 기억하게 되며, 이미지 형태로 떠오르게 되는 ‘이미지-기억(souvenir-image)’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왕복하면서 현재 상황에 맞게 유용한 과거의 기억들이 현실적 의식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작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성연화 역시 베르그손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과거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순수기억을 아름답게 잡아두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로서의 성연화는 이에 더해 과거와 현재를 수도 없이 왕복한다. 아름다운 기억을 집착에 거치지 않고 순수기억을 작업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은 반복해서 이어진다. 부모와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작업을 통해 기억보다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아마도 미래의 과거는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작업의 과정에서 붓을 잡고 짧은 시간에 모으는 집중력으로 무념의 상태에 빠져들어 일필로 완성해 내는 필선(筆線)의 쾌감은 그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며 정체성을 완성한다. 과거의 ‘습관기억’에서 오는 또 하나의 차별성이다.
작업에 대한 욕심과 초월의 심리적 압박은 많은 작가가 가장 힘든 고초로 경험하게 된다. 현재의 작업 세계를 초월하기 위한 심리적 압박감은 더하거나 과하게 되면서 더 큰 혼란을 초래한다. 그러나 성연화 작가는 감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수양을 이어간다. 수양을 위해 찾아다니는 사찰에서 느끼는 시각적 안정감은 공기와 빛에서 묻어나는 종교적 철학적 사유가 더해져 비워가는 법을 익힌다. 그러는 사이, 그는 아주 아득한 과거의 한옥 처마 밑에 앉아있는 자신과 마주한다. 현재의 사찰과 과거의 한옥에서 느끼는 물리적 감성적 동질성은 과거의 자기 스스로에 다가서는 충분한 매개체가 된다. 흄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과거의 기억은 상상력과 연결된다. 기억과 현실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는 선에 대한 강한 욕심보다는 선을 단순화하는 작업으로 붓을 움직인다. 이러한 과정에서 완성으로 이어지는 작품은 그것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연결된다.
지난 작업들이 한옥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져 튀는 물방울이었다면, 이번 작업들은 비 온 뒤 먼발치에서 내려다본 한옥과 자연을 잔잔하게 뒤덮은 안갯속 기와집과도 같다. 혼신의 집중력으로 올려진 선은 최대한 절제되고, 선을 품고 있는 면과 하나 되는 작업이다. 하나하나가 요동치지 않고 전체가 잔잔하게 어우러진다. 그가 과거의 시간에서 현재를 담아내는 것이고, 시간을 되돌려 그 시간을 오늘에 몰아넣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 것이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론이 될지언정,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정체성이자 작가로서의 정체성임이 분명하다.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종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