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조 Paek Yunzo
평론
걷기에 담긴 미적 설계와 삶의 긍정성
_의식된 이미지와 이미지로서의 의식

홍경한(미술평론가)
1.
‘걷다’라는 행위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창의적인 활동에 도움을 준다. 또한 걷기를 통해 영감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들어온 예술가들도 드물지 않다. 일례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 난민 작가인 히와 케이(Hiwa K)는 디아스포라(Diaspora)적인 자신의 삶을 개인적인 기억에 기대어 전기(傳記) 형식으로 풀어 왔다. 그 일련의 기록엔 이주의 경험이 놓였고 식민시대의 역사, 현대 정치사 등이 포함된 다학문적 접근법이 새겨졌다.
그의 여러 작품 중 <프레이미지/모국어만큼이나 눈이 먼(Pre-Image/Blind as the Mother Tongue)>(2017)는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해 걸어가는 자신의 여정을 길가메시(Gilgamesh) 에 비유하여 서술한 작업이다. 정확히는 젊은 시절 혼란스러운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탈출하여 유럽까지 걸어갔을 당시 터키, 그리스 아테네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과정 을 녹였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사진작가인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역시 걷는 행위를 통해 도시의 생활, 건물의 아키텍처,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그들의 삶을 사진 작품으로 표현했다. 걸으면서 마주하는 도시의 거리와 사람들은 그의 작업을 통해 평범함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촉매가 되었다.
영국의 리처드 롱(Richard Long)은 아예 걸음(걸으면서 남기는 흔적들)이 곧 예술인 경우다. 그는 산악 지형에서의 오랜 걷기를 통한 설치와 사진 등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시간의 흐름 등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작품은 ‘걷기의 발자취’라고 해도 무방하다.
1세대 대지 미술가인 오쿠보 에이지(Okubo Eiji)에게도 ‘걷기’는 작가만의 조형언어를 생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그 자체로 미적 의미를 지닌다. 그는 ‘걷다’라는 행위로 자연에 대한 동경과 예찬을 피력해왔으며, 이러한 행위는 새로운 형식의 퍼포먼스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연결시키는 생태학적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오쿠보 에이지의 설치 작품 대부분은 자연에서 얻은 것을 이용하고 전시가 끝나면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데, 이와 같은 훼손 없는 자연주의적 사고와 자본주의적이거나 인공적인 것의 인위적인 배제는 여타 미국 중심의 대지미술 작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2.
작가 백윤조의 작품에서도 ‘걷다’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작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거론한 작가들과는 결이 다르다. 작가는 ‘걷다’의 시작에 대해 “한때 몸과 마음에 있던 응어리들이 걸으면서 사라지곤 했다.”며 “(걸을 때) 소소한 기쁨, 좋은 기분,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고 그 힘으로 그림이라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작가 개인 에게 ‘걷다’는 모든 잡생각을 없애거나 새로운 작업계획을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자, 스스로 살아있음을 체감하는 과정인 셈이다.
자꾸만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걷기란 삶의 활력을 선사하는 의외의 선물이 되기도 한다. 평상심을 찾고 나름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갖게 하는 것, 내 앞에 놓인 삶에 집중하며 인간사에 얽힌 숱한 고민조차 융해시킬 수 있도록 용기를 심어주는 것은 분명히 걷기의 장점이다. 여기다 조형의 발상까지 가능하다면 걷기란 단지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서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는 것을 넘어선다.
미적인 관점에서 걷기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벗어나 생각의 이동을 통해 내적인 것에서의 외적인 함의를 가능케 하는 행위다. 작가는 이를 “걸으면서 주는 안정감과 잡생각들을 비워내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의 ‘행위’는 의식적•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지’를 전제로 한다.
의지는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즉 분명한 목적과 동기가 바탕이다. 그러나 백윤조의 그림엔 주렁주렁하게 매달린 각주가 거의 없고, 시각적으로도 매우 단순하다. 그의 그림에서 목적과 동기는 좀처럼 파악이 안 된다. 실제로 혼자 혹은 여럿이서 걷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의 인물들은 분명 어딘가로 향하고 있으나 목적지를 알 수 없다. 어째서 걷고 있는지도 그림은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저 관람자들의 상상력에 맡긴다. 이게 포인트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명시적이지 않다. 개인마다의 사변적 이야기와도 큰 관계가 없다. 2020년 작품 와 2019년 작품 에서처럼 그 인물들은 백윤조 특유의 조형법인 형태의 단순화가 두드러지며 세부 사항은 다소 비어져있다. 이들은 보통 중립적인 상황에서 제시되는데, 특이하게도 구성의 단순함이 오히려 몰입감을 형성하고 주제의 본질에 다가서도록 한다. 더구나 이러한 조형요소들은 그의 작품에 부유하는 현대적인 느낌에 기여한다. 이야기의 흐름에 관한 상상을 더욱 촉진한다.
상상은 백윤조 작업의 매력이다. 명시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보단 각자의 방식으로 추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그의 작업이 지닌 흥미로움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림 속 인물들의 걷기가 아무런 이유조차 없이 행해지는 건 아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 등의 다양한 동물과 병, 공 등의 사물들을 통해 모든 작업들이 ‘의식된 이미지’임을 열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거운 배낭과 커다란 신발(워커)을 신고 앞으로 전진해 가는 장면을 그린 라는 제목의 작품은 삶의 책임감과 무게감이 심어져 있다. , , , 등의 많은 작품들도 의식된 이미지다. 작가가 머물렀던 장소 혹은 존재한 찰나의 기억과 공간의 느낌이 이입된 이들 작업은 시간과 속도 등의 일시적, 경험적 서사의 투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3.
그의 작업엔 흐르는 시간 속에 자연스레 잊혀간 존재에 관한 책망, 그리고 본질적인 순수함을 갖고 싶은 마음을 담은 인형과 더불어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걷는 남자의 품에, 어떤 여인의 손에, 2021년 그린 에서처럼 가끔 단독으로도 새겨진다.
물론 메시지도 들어 있다. 새로운 해를 맞아 힘들더라도 우직하게 걸어가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마냥 유난히 발을 크게 그린 일련의 시리즈와 등에선 정진이 드러나며, 밝음을 덧대는 동물이나 인형 등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의 그림은 약간 멜랑콜리(mélancolie)한 측면이 있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담아낸 것임을 읽게 한다. , , 등에서 발견되듯 동물과 인형을 들고 가는 인물에 도둑(Thief) 또는 ‘무임승차자(Free rider)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은 진짜 도둑이 아니라 망각과 존재에 대한 상실을 은유하는 것으로, 에서 잘 배어나듯 소중한 대상을 잃고 싶지 않은 작가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 구원에 관한 양가적 의미가 배어 있다.
다만 작가는 이를 심각하게 그리지 않는다. 도둑질은 나쁘지만 오히려 동물이 무임승차자의 주인공으로 대체되면서 유머러스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의 말처럼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소소한 장난, 익살스러움에 관한 관심”은 약간의 반전을 불러오고 언뜻언뜻 드러나는 시니컬함은 불편하기보단 해학성을 소환한다.
점프하듯 뛰는 사람에게 안겨있는 고양이를 그린 작품과 이번 전시엔 선보이지 않으나 낙서화처럼 비춰지는 ‘두들’(Doodle series) 연작에서 파생된 시리즈와 인물의 움직임을 재치 있게 담은 작업들도 사실상 동일한 범주에 있다. 이들 작업은 율동감, 유쾌함과 함께 역설과 이중성, 모순과 의문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분모가 같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상징과 기호로 묶여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의식된 이미지이자, 이미지로서의 의식의 산물이다.
이미지로서의 의식은 ‘사고의 유영’을 드러내는 장치다. 작품 속 인물들, 그들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구상적, 인지적 형상을 통한 같은 시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현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행위의 양태를 타인들과 공유하며 공존하는 방식 면에서 사고의 유영은 백윤조 작업의 핵심과도 같다. 그 유영 안에서 서사도 생성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의 작업은 현상으로서의 지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장면마다 어떤 현상들이 녹아 있는데, 지각은 감각 정보의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능동적이고 구체화된 참여이자 그의 그림 속 자연물과 사물이 어떠한 문화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을 전제로 하는지 알려주는 단초다. 그의 그림이 가볍게 흘려보낼 시각적 유희가 아니라 작가가 어떻게 세상을 지각하고 인식하며 해석하는지에 관한 이해도 여기서 비롯된다.
따라서 백윤조의 작품들은 어쩌면 그저 일상 가까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물건이나 동물, 장면일 수 있지만 그것의 실체는 의식된 이미지와 이미지로서의 의식을 거쳐 현상으로서의 지각 아래 생성된 결과라 해도 무리는 없다. 타자가 어떤 상황 아래 받아들이던 상관없는 상태, 내러티브에 연연하지 않고 있기에 더욱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상태이기에 우리가 간혹 놓칠 뿐이다.

4.
작가의 작업은 사실주의와 추상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스치듯 보자면 누군가에겐, 사실은 나와 무관한 일상이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예술적 시각으로 나열될 때 놀라운 장면으로 드러나며 그럼으로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 구조 내에는 공간과 시간 사이 서로 다른 존재 간의 교류가 배어 있을뿐더러 개인과 상황 간의 일화와 묘한 긴장감이 각인되어 있다.
이렇듯 백윤조의 작업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현대인으로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상황에 직면토록 한다는 점, 현상과 상황을 통한 사물의 존재 의미를 작가 나름의 시선으로 연극처럼 설정해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보편성을 특별함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또 있다. 바로 드로잉이다. 작가는 작업에 있어 모델을 지정하지 않는다.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남기고, 이 충동적인 드로잉을 중심으로 화면을 조심스럽게 맞춰나간다. 뭔가를 억지로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는 대신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 속 구성적인 측면에 무게를 둔다. 그래서 그 자체로 드로잉적이면서도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지나치게 정리되다 보니 장식적인 여운도 없진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금 더 반응적이거나 과감해도 될법하다. (‘두들’ 연작에선 잘 드러난다)
차분한 여운이 없진 않고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나, 필자의 생각에 백윤조의 역량은 드로잉에서 보이는 자유로움, 고정된 기술(記述)을 극도로 배제한 상상의 소실점에 설 때 더욱 빛난다. 별것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자신만의 문법으로 작성하는 재주에다 감각적인 소통까지 이뤄내고 있으니 우리 일상의 평범함은 더 이상 평범하지도, 특별하게 남지 않을 것은 자명해진다.
인상적인 건 전체적으로 보아 구상이라는 테두리에 있음에도 평면성이라는 형식을 뚫고 공감과 공명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상상력을 자극하고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내가 아닌 타인들이 마음껏 자신의 주관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것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예술가 자신만의 언어로 새롭게 제시하고 만들며 질문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있어 매우 유가치하다 할 때, 고유의 언어를 만들기 위한 오늘의 경주야말로 백윤조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래다. 작품이야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