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연례 Seung Yun-Ray
드로잉과 회화, 경계 위의 Fantasy
드로잉, 회화로서의 완성

드로잉(drawing)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최근 방대한 작업량으로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작가 승연례의 작업을 통해 드로잉에 대한 미학적 가치를 재고해 본다. 현대미술은 작품의 영역을 무한정 확대하고 있다. 주제나 재료의 활용에서 제한적이지 않다는 점과 작가의 일상이나 생각 그리고 시간까지 작품의 주제나 소재로 등장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현대미술은 장르조차도 해체 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의 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의 사소한 자전적 이야기는 작품의 차별성으로 나타나고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네러티브를 공개하는 방식은 당연히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창작의 자율성에 의한 결과물인 작품에 기반한 것이다. 창작은 작가에게만 주어지는 고유의 권한이다. 오랜 시간 동안 드로잉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활용되는 하나의 스케치와 같은 인식으로 인해 고유의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원시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인간의 원초적인 수법이자 미술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표현 방식이 드로잉이다. 혹은 서구의 고전 미술에서 볼 수 있듯이 선(線)을 이용해 세상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것에 치중되었으나, 이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때로는 추상화시키는 작업은 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변천사를 형성한다.

시대를 되짚어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19세기에는 신고전주의의 앵그르가, 20세기에는 고흐, 마네, 드가, 르누아르로 이어지는 많은 작가들의 개성 넘치는 작품들에서 드로잉의 작품성은 이미 평가받았다. 특히 다빈치는 드로잉의 훈련은 관찰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고 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관찰과 탐구 그리고 기록이라는 드로잉의 기본적인 특징을 잘 구현한 작품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17세기에 들어서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근대 드로잉의 개념을 설정하였다. 그는 주카리(Federo Zuccari)를 통해 미술가의 내적 관념과 그것이 실제로 표현되는 외적 구조라는 두 가지 개념을 발견했다고 한다. 특히 내적 관념은 현대미술에서 등장하는 아이디어와 개념을 의미한다는 시각도 있다. 19세기 폴 세잔의 드로잉이 선을 원칙으로 하는 관습을 깨고 색으로 드로잉을 시작했고, 반 고흐는 드로잉과 회화를 넘나드는 작업방식에 천착하면서 선과 색의 우선에 대한 의문의 작업을 통해 공식화했다.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퍼포먼스, 설치, 개념미술 등의 대안적 매체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면서 드로잉에 대한 재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술가들은 드로잉에 대한 정의를 재고하고 개념을 확장해 가면서 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조형 요소인 선과 색이 공존하면서 회화와 드로잉에 대한 경계가 해체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서의 작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20세기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는 가치는 언제나 예술 안에서 존재해 왔지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항상 평가절하되어 부차적인 작업으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바로 ‘드로잉’이다. 자발성, 창조적인 관찰, 직접성, 실험, 단순성, 축약, 표현, 즉각성, 개인적인 시각, 기술적 다양성, 수단의 겸손함, 날것의 생생함, 파편, 불연속성, 미완, 열린 결말. 이것이 오랜 시간 동안 언제나 존재해 왔던 드로잉의 특징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Michael Crag Martin>

드로잉은 크레이그 마틴이 이야기한 다양한 특징을 통해 시간적인 흐름이나 심리적인 서사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기법임이 분명하다. 즉, 작가의 기억이나 감정의 표현을 시간의 경계 없이 단순한 도구만으로 가장 빠른 방식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은 드로잉이 작품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는 이유다. 감수성이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드로잉은 작가의 삶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며, 내적인 자아와 외적인 자아의 소통 수단이며 작품으로 완성된다. 더하자면, 드로잉은 지속적인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언급할 수 있다. 마티스는 노년에 몸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앉아 가위로 색종이를 잘라 외곽선을 드러내는 컷아웃(cut out) 작업을 이어갔다. 이것은 드로잉 작업의 한 방식이었고 스스로는 “가위로 하는 드로잉”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드로잉의 특성을 관찰한 결과의 집약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드로잉은 선이라는 조건이 종이와 연필이라는 고전적인 한계를 탈피하고 자연의 설치작업으로, 혹은 인간의 신체 드로잉 등 개념과 한계가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 승연례의 작업에 담겨있는 일상성, 독자성, 시간성, 심리적 서사, 선과 면의 무제한 등 많은 부분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의미로 본다. 그는 작업에서 종이와 크레용이라는 고전적 재료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드로잉이라는 한정적 관점이 아닌 회화로서의 작업으로 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만큼 그 관점을 이동해야 한다. 더구나 최근 작업에서는 캔버스에 평붓으로 마치 대형 크레용을 이용하듯이 기법을 과감하게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미 스스로가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경계에 대한 개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되어 거닐다

작가 승연례의 작업은 바람에 대한 영감이 팜나무(Palm Tree)에 다가섬으로써 시작된다. 팜나무와 팜나무 사이, 잎 사이, 가지 사이 그리고 둥치에 매달려 있는 껍질 사이에도 언제나 크고 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작업을 하는 하루하루, 작품의 한 점 한 점에 실려있는 바람을 걷어낼 수는 없다. 작품에 바람을 담을 수 있기에 엄청난 양의 작업임에도 작품 한 점 한 점의 느낌은 각기 다르게 와 닫는다. 그가 처음 마주했던 팜나무에서도 바람과 더불어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팜나무를 그리는 선과 면의 움직임은 바람을 타고 흐르는 팜나무의 자태를 상상하고 그려낸다. 그래서 바람은 작가와 팜나무 사이의 중요한 소통 방식이다. 현실적으로 팜나무가 보이지 않는 작가의 주거 환경에서, 혹은 어느 공간에 가서 작업을 하든 팜나무를 연상하고 영감으로 이질 수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의 상상은 늘 바람이 되어 팜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영감은 작업을 하기 위해 의도된 시간에 찾아 다니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오랜 시간 속에서 자아에 내재한 영감이 에너지가 되어 작업으로 이어진다. 아직도 식지 않은 시각적 예리함과 풍부한 감수성은 일상에서 작업을 위한 풍만한 영감으로 축적된다. 특히, 꽃과 나무 같은 식물에서 느끼는 감수성은 특별하다. 감성으로 다가서서 자아에 내재하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본능이고 작업에 고스란히 담긴다. 아직도 길을 걷다가 잡초 잎이나 야생화라도 보이면 그냥 지나지 않고, 다시 보고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감탄사를 읊조리는 소녀와 같은 감성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이건용 작가가 필자에게 슬그머니 귀띔해 준다. 일반적인 팜나무는 키가 크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키의 팜나무가 있는가 하면, 작고 풍성한 잎을 가진 팜나무도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팜나무는 대부분 키는 작지만 풍성한 잎과 듬직한 둥치를 가지고 있고, 작품마다 자태는 각양각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작업에서는 낮은 키의 팜나무 세 그루가 둥치가 부러질 듯이 휘어져 잎을 날리고 있는 작품도 있다. 과거 혹은 현재의 한 시간 속에서 엄청난 바람을 견디고 있는 의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마치 작가의 삶의 한 단면을 이야기한 작품으로도 보인다. 팜나무의 유연하면서 강인한 자태는 작가와 닮은 모습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크레용이라는 하나의 단순한 재료로 선과 면을 충분히 혼용하여 작업 전체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크레용을 눕혀서 면을 연출하는가 하면, 그 위로 다시 세로 방향을 가로지르듯이 날카로운 선이 지나가기도 하고 꺾이듯이 딱딱하고 강한 선이 더해지면 재료의 한계성을 초월하는 독특한 작업으로 완성된다. 이런 과정에서 작품은 매우 동양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한 점의 작품은 극도의 집중력으로 짧은 시간에 완성된다. 크레용을 잡은 손놀림과 속도감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고, 힘의 강약에 따라 마치 한지에 먹을 이용한 수묵 작품을 연상케 하는 색의 농담까지 느낄 수 있다. 동양화의 전통적인 필묵을 이용한 표현 방식을 연상케 한다. 동양화의 화론 육법에서는 여섯 가지의 화법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붓을 힘있게 잘 사용하는 골법용필(骨法用筆)이고 이것이 완성될 때 작품에서 기운생동(氣運生動)을 느낄 수 있으며 작품으로 승화된다는 의미다. 작가가 손에 쥔 크레용은 오랜 세월을 쥐고 그려온 붓과도 같아 그 움직임과 표현이 작가와 일체 되어 움직인다. 대부분 작품에서 보이는 처리하지 않은 배경의 여백은 그대로 비워두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동양 미학에서 볼 수 있는 여백과도 같다. 여백은 비어있으나 비어있지 않으며 하늘이 될 수 있고, 우주가 될 수 있는 상상의 공간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팜나무 주위를 맴도는 바람은 잎 사이로 가지 사이로 틈틈이 스치다가 여백이라는 무한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바람이 만들어 낸 영감은 작가 승연례의 초월적인 표현으로 이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종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