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대 미술의 신성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접근 방식이 어쩌면 판타지적 세계관보다 마이코 코뱌야시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지 모른다.
…마이코 코바야시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타인을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매체이자 행위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생명체들은 때로는 홀로 때로는 무리 지어 있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히 귀여운 혹은 ‘카와이’적인 측면을 넘어설 필요가 있는데 토끼, 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하이브리드 생명체들이 마치 사람과 같은 생김새와 표정,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도대체 이 생명체들은 무엇일까? 작가의 자유로운 창조성을 담아내는 공간이자 우리네 인간의 감정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작품의 감정에 압도되고 마는데 기쁨보다는 슬픔과 고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감정들은 오롯이 작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작품의 가장자리는 일부러 해져 있고, 찢겨진 드로잉 페이퍼들이 반창고 종이처럼 서로 겹쳐져 있다. 마치 상처를 덮는 것처럼. 이렇게 작가에게 창조의 행위는 곧 연민의 행위가 된다.
작가의 페인팅 기법은 다소 구체적이다. 우선 젯소가 여러 겹으로 쌓인 모노크롬 배경 위로 캐릭터를 그린다. 이후 또 다른 배경을 칠하면서 그렸던 캐릭터를 다시 지워낸다. 그 위로 다시 동일한 캐릭터를 그려내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는 마치 생명체가 캔버스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떠오르며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무에서 생명체들이 태어난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실존주의의 문제가 다시 한번 제기된다. “존재가 본질에 선행하는가?” 작품 속 생명체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적이었던 감정들이 이내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한다. 작품에 공감하면 할수록, 작품 때문에 동요되는 감정을 이내 억제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이런 이유로 일단 마이코 코바야시의 작품을 한번 접하게 되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마이코 코바야시는 일상 속 다양한 스케치 과정을 통해 생명체들의 형태와 표정을 만들어 낸다. 영국 체류 기간에는 신문지 위에다가 종종 스케치 하기도 했다. 이러한 드로잉 페이퍼들은 그녀의 작업실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된 생명체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인물화 스케치들은 우리네 존재에 대한 질문이자, 이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는 행위 그 자체일 것이다.
소피 카발리에로,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