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코 코바야시 Maiko Kobayashi
평론
“세상의 문턱”에 서다

마이코 코바야시가 반복적으로 그리는 캐릭터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의식의 발로에서 구현된 것이다. 어린 시절 노트 한쪽에 끄적이며 그렸던 낙서처럼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원초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은 모티브와의 감정적 연결보다는, 외적 존재에 대한 관계성 즉 모티브의 존재감을 ‘느낀다’는 의식을 가지게 한다. 동물을 의인화한 듯한 그 외적 표상은, 그녀가 유년기부터 친밀하게 지내 온 인형이나 팬시, 굿즈에 영향을 받았다. 본래 상업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캐릭터는 어떤 틀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여 사람들의 욕망과 내면의 은밀한 이야기를 소환하여 상기시키는 상징기호의 조합으로, 많은 사람의 공감과 교감을 모으는 다양한 형태로 기능하고 있다. 반면 코바야시는 그러한 소비재로서의 캐릭터보다는 '아니마’라고 하는 본질로 되돌아가 지극히 찰나적인 특성을 가진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원래 팬시, 굿즈와 같은 캐릭터들은 단순화된 기호로 구성되고, 이름이나 가족 구성, 좋아하는 음식 등 단편적인 정보만 부여돼 있어 소비자의 상상력이나 감정을 투영할 여지를 남기는데, 코바야시의 작품에는 이러한 상상력의 여지가 더욱 폭넓게 작용한다. 그녀의 작품 속 존재들은 현실에 공존하며 우리의 다양한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며 공명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코바야시의 표현 방식은 드로잉과 그림에서 조각까지 확장되고 있다.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작품마다 복잡한 뉘앙스를 전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깊고 내밀한 정서적 이입을 가능케 만든다.

작품 제작에 있어 코바야시는 먼저 바탕 화면이 되는 소재 즉 용지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찢고, 문지르고 때로는 이어 붙인 일본 고유의 종이(화지)를 나무 패널이나 캔버스에 붙이며 다채로운 미학적 효과를 더한다. 손의 움직임에 감정을 부여하며 작품의 용지는 오롯이 작가의 모든 감각을 담아내는 힘을 가진 공간이 된다. 즉 바탕 화면은 그 위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서로 겹쳐지고 연결되게 하는 물리층의 역할을 한다. 코바야시는 단 한 장의 종이(화지)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그 소재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려 자신만의 표현 수단을 극대화한다. 게다가 캐릭터(인물)와 바탕(배경)을 조화롭게 융화시켜 강하고 응집력 있는 ‘심상’을 만들어 낸다. 소재를 하나의 표현 요소로 나타냄으로써 그녀의 작품은 현실의 물리적 실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화면을 마주한 작가가 손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감정과 언어를 끄집어내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이내 추상적인 생각들에 구체적 ‘존재’로서의 형태가 부여된다. 묘사와 사색 사이를 오고 가는 이러한 움직임은 작가 의식 내부의 근본적인 주제를 명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관을 객관화하는 데 중요한 과정으로 작용한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사물과 이미지, 현실과 환상, 전과 후, 외부와 내부라는 작품을 둘러싼 질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개념들을 양면적으로 다루기보다 의식적으로 얽힌 구조로 인식하고, 혼란 속에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다. 잠재된 심리적 메타인식을 통해 추출된 작가 내면의 감정과 생각이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될 때, 주체와 타자는 서로 얽혀 우리 앞에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 앞뒤로 움직이는 손과 생각의 흔적은 선과 색의 '겹'이 되어 강렬하고 풍부한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데, 이는 실제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의 층들이 지탱하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코바야시의 본인의 초상'이자 '우리의 초상'인 수많은 '현대의 초상'을 만들어낸다.

시선을 강하게 끄는 그녀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외면하듯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관람객을 조용히 응시한다. 조형적인 강렬함과는 대조적으로 어딘가 연약함이나 위태로움을 느끼게 하는 이 캐릭터들의 시선에 관람객은 마치 그들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캐릭터와 관람객 사이에는 이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교감이 이루어진다. 코바야시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여 타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자신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간다. 그녀의 작품은 작가가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권위적 방식을 최대한 배제한다.

작가는 일상이나 작품 구상 중에 느낀 생각과 감정, 떠오르는 단어를 적어 작업실에 붙여두곤 한다. 그 중 “어려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실제 삶의 순간을 마주하세요. 이것은 당신이 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힌트와 탈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메모가 있다. 작가는 전 세계가 직면한 사회 문제에 마주칠 때마다 비관적으로 되지만,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강인함에 매력을 느낀다. “모순적인 감각의 마찰에서 비롯된 에너지가 내 그림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작품은 가혹한 현실과 그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양상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코바야시가 묘사하는 캐릭터들은 작품과 관람자를 연결하는 존재로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존재로서 '나'와 동등한 존재인 '당신'에 가깝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의식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느낌은 정형화되지 않고 항상 변화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 고유의 자유로운 해석을 가능케 한다. 어쩌면 코바야시는 작품이 하나의 생명체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랑'과 '연민', '연약함'과 '강함', '우울'과 '슬픔'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세상의 문턱'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타케시 쿠도 (다가와시 미술관 관장),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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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코 코바야시- 심리적인 머리를 지닌 생명체들


인간은 얼굴을, 얼굴이라는 난해하고 깊은 표면을 갖고 있다. 이 표면은 언어와 문자를 대신해서 아니 오히려 그것들의 부재와 숨김, 억압과 한계를 초월해 헐벗고 정직한 상태에서 밀려나듯 최전선에 나와 있다. 세상의 모든 경계를 얼굴의 피부가 스스로 제 살갗으로, 온 감각으로 접촉하고 있다. 말, 음성을 잃은 얼굴은 대신 표정과 안색으로 몸 안의 모든 것을 부득이하게 방사하고 누출한다. 특히나 눈은 그것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의 거의 유일하고 강력한 장소를 제공한다. 물론 얼굴에 자리한 다른 감각기관들 내지 표정과 주름들도 감정 상태를 표상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기호이자 이미지를 만들어 보이고 있지만 인간의 눈은 타자의 시선이 몰려드는 강한 흡입력 있는 장소가 되면서 결정적으로 감정의 어느 상황성을 풍경처럼 펼쳐 보인다. 더구나 눈동자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생동하는, 생성하는 몸과 감정의 애매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보는 눈이자 보여지는 눈이다. 나의 것이자 타자의 것이기도 한 눈이다.

마이코 코바야시는 인간의 얼굴과 유사한 동물의 머리를, 주로 머리만을 단독으로 그린다. 동물이라기보다는 동물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다. 동물 그 자체를 재현한 것은 아니고 그것으로부터 기원하는 유사한 도상, 작가에 의해 단순하게 추려지고 도상화된 머리이자 일종의 캐릭터로 만든 머리다. 인간과 인형, 동물의 얼굴/머리가 혼성된 복합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얼굴이 아니기에 그것은 머리인데 그러나 인간의 얼굴처럼 복잡하고 내밀하고 섬세한 여러 감정을 잔잔하게 내밀고 있다. 동물의 머리도 표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타자인 동물에게도 인간과 대등한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감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없다. 인간은 얼굴의 표정뿐만 아니라 말과 글을 통해, 행동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지만 동물의 경우는 극히 제한된 경우, 그리고 기록의 부재로 인해 인간이 그것들의 감정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코바야시가 그린 이 머리는 감정에 충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에 가까우면서도 낯선, 동물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머리인데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머리다.

의인화된 이 도상들은 다리/앞발이 인간의 팔처럼 그려지거나 반신상이 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머리만이 커다랗게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발/팔은 작게 그려지고 몸통 역시 머리에 비해 축소되어 있다. 결국 인간과 동물이 뒤섞인 혼성적인 머리 자체가 이 그림의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그리고 그 머리는 거의 커다란 눈만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에서 눈을 제외한 나머지 기관은 아주 작게 자리하고 있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과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과 종이 또는 종이봉투 등의 오브제 위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등으로 이루어진 드로잉이 주를 이루는 작업이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주로 머리 내지 상반신만을 단색의 배경에 위치시켰다면 드로잉은 머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그려진 경우와 그림 주위에 영문 문장이 기입되어 있어서 마치 만화의 말풍선에 들어있는 문자를 연상시킨다. 그 문자는 이 유사인간형의 동물 캐릭터의 음성처럼 화면의 여백 주위를 떠돌며 자기감정을 기술한다.

여러 겹의 젯소를 칠해 만든 견고하고 밀도 있게 올려낸 단색의 화면은 단독의 머리 뒤로 물러나 있다. 이 배경, 여백은 단순하고 명료한 색면 추상과도 같지만 그 내부는 여러 시간과 과정, 물감의 층, 질료의 축척 등에 의해 단단하고 두께가 있는. 깊이가 배어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단색이자 두 개의 색면으로 분할되어 있기도 하고 더러 그 주위로 여러 선들이 선회하면서 다층적이고 변화 있는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다. 이는 캐릭터의 머리 처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로 인해 그림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견고한 회화적인 맛을 거느리고 출몰한다.

그것을 딛고 단독의 머리가 올라와 있다. 개나 토끼, 고양이의 머리와 인간의 얼굴이 합성된 듯한 이 귀여운 머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귀여우면서도 어딘지 서글픈 구석이 있다. 이 머리가 짓고 있는 표정을 정확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조금은 침울하고 조금은 명랑하면서도 조심스럽고 내밀한 표정이다. 인간이 짓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표정을 인간과 유사한 캐릭터가 대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이 그림에서 주목된다. 인간을 대리해 이 캐릭터는 한 개인의 모든 감정의 여러 뉘앙스를 고독하게 연출한다. 여기서 작가와 관객은 그림을 통해 감정의 관여와 이입, 그리고 참여가 작동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대리물로, 자아의 대체로 캐릭터를 빌어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외부로부터 빚어지는 여러 감정의 상황을 구현한다. 그림을 보는 관객 역시 저 캐릭터의 머리/표정에서 연유하는 심리적인 상황에 자신의 마음을 대입하여 공감대를 형성해 보거나 고독한 개인들이 겪는 사적인 삶의 불가피한 굴곡 심한 감정의 경로를 상상해 본다. 그 궤적을 그려본다.

마이코 코바야시가 그린 이상한 생명체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감정의 어느 한 순간을 은밀하면서도 조심스레 건네듯이 그려 보인다. 그것은 그저 커다란 얼굴과 또 그만큼 큰 눈을 통해 다소 쓸쓸하게 빛난다.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얼룩들이 단순하고 무심하게 내려앉은 화면은 자기 안에서 겪는 모순된 감정의 마찰과 여러 상처를, 무력감과 생의 의지 사이의 갈등을 온전히, 스스로 견디듯 간직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 개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킨다.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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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 미술의 신성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접근 방식이 어쩌면 판타지적 세계관보다 마이코 코뱌야시의 작품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지 모른다.

…마이코 코바야시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타인을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매체이자 행위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생명체들은 때로는 홀로 때로는 무리 지어 있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히 귀여운 혹은 ‘카와이’적인 측면을 넘어설 필요가 있는데 토끼, 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하이브리드 생명체들이 마치 사람과 같은 생김새와 표정,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도대체 이 생명체들은 무엇일까? 작가의 자유로운 창조성을 담아내는 공간이자 우리네 인간의 감정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작품의 감정에 압도되고 마는데 기쁨보다는 슬픔과 고통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감정들은 오롯이 작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작품의 가장자리는 일부러 해져 있고, 찢겨진 드로잉 페이퍼들이 반창고 종이처럼 서로 겹쳐져 있다. 마치 상처를 덮는 것처럼. 이렇게 작가에게 창조의 행위는 곧 연민의 행위가 된다.

작가의 페인팅 기법은 다소 구체적이다. 우선 젯소가 여러 겹으로 쌓인 모노크롬 배경 위로 캐릭터를 그린다. 이후 또 다른 배경을 칠하면서 그렸던 캐릭터를 다시 지워낸다. 그 위로 다시 동일한 캐릭터를 그려내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는 마치 생명체가 캔버스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떠오르며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무에서 생명체들이 태어난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실존주의의 문제가 다시 한번 제기된다. “존재가 본질에 선행하는가?” 작품 속 생명체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일상적이었던 감정들이 이내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한다. 작품에 공감하면 할수록, 작품 때문에 동요되는 감정을 이내 억제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이런 이유로 일단 마이코 코바야시의 작품을 한번 접하게 되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마이코 코바야시는 일상 속 다양한 스케치 과정을 통해 생명체들의 형태와 표정을 만들어 낸다. 영국 체류 기간에는 신문지 위에다가 종종 스케치 하기도 했다. 이러한 드로잉 페이퍼들은 그녀의 작업실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는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된 생명체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인물화 스케치들은 우리네 존재에 대한 질문이자, 이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하는 행위 그 자체일 것이다.

소피 카발리에로(미술평론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