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애 Choi Myung Ae
상상과 현실이 마주하는 두 개의 정원
인간에게 정원(garden)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단순한 장식이나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무엇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취하는 것이 정원이다. 때로는 상징적이고, 때로는 명상적이며, 또 가끔은 반성적인 공간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무궁무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명애 작가의 집은 목조건축공법으로 만들어진 주택으로 정원이 둘러싸고 있다. 집을 지을 당시부터 작가가 20년 넘게 꾸며온 정원이다. 꾸며왔다기보다 표출하지 못한 작가로서의 감성을 집적해 온 곳간과도 같은 정원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더 의미 있고 특별하리라 짐작된다. 집 뒤로 자리 잡은 정원은 넓은 잔디 마당과 큰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여유로운 풍경이다. 이에 비해 집 앞에 자리 잡은 정원에는 다양한 화초들이 즐비하고 그 좁은 공간 사이로 혼자 거닐 수 있는 앙증맞은 산책길도 있다. 오가피, 수국, 라일락, 국화, 감나무, 단풍나무 그리고 다육식물까지, 거대하지는 않지만, 햇살 받아 반짝이는 꽃 빛이 있고, 바람 타고 흐르는 향기가 있고,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곤충들이 어우러져 생태를 형성하고 있어 사계절 내내 볼거리를 이어가는 작가만의 공간이다. 최근 작가는 작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작가와 정원 사이에는 정신적 교감의 시간이 깊어지는 듯하다. 기다림과 보살핌의 긴 시간 끝이 다가오는 또 다른 시작이라고나 할까? 화초와 더불어 개미와 지렁이 까치, 들고양이까지 작은 생태공간에서 생명체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공간에서 흙과 돌, 식물, 나무의 틈 사이를 조용히 거닐 때면 정원은 정신적 영감과 육체적 에너지를 고스란히 작가에게 전한다. 정원의 향기를 담은 바람이 불어와 전신에 뿌릴 때면 시각적으로 느끼는 그 이상의 감성을 자극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작업에 심취하는 요즘 작가는 더 크게 느낀다. 그런 초월적인 감성들은 가까운 관악산을 끊임없이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자연의 기를 받으며 떠올린 영감과도 적지 않은 관계가 있으리라. 정원에 있는 모든 것들과 편견 없는 시선으로 담화 나누기를 이어온 결과이기도 하다. 관악산 숲의 기억과 일상에서 같이 해온 정원 사이에서 오는 경이로움의 영감들이 작업으로 이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정원을 지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정원을 마주한다. 그야말로 신자연주의 작가의 작업으로 둘러싸인 정원이었다. 작업 공간이 모자라 거실과 계단까지 최근 완성된 작품들로 가득하다. 집 앞으로 꾸며진 정원과는 다르게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화려한 작업들이 집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데 작년 처음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말을 걸어온다. 작업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가 말을 걸어오고 움직임이 있다. 정작 작가 본인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 설명이 무색하게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하려고 하는 작업들이다. 마치 정원에서 담아온 생명체와 흙 내음, 공기와 소리들을 거실 가득한 그림에 풀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과히 작가의 새로운 정원 만들기의 시작이다. 작년의 역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구도와 필 선 그리고 강한 색감이 작품의 존재감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던 작업과는 다른 느낌이다. 평온한 색채감과 화면에 자연스럽게 올려진 원형은 안정적이고 온화한 흐름이다. 전신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작업에 임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품의 완성도는 더 탄탄하고 감수성은 더 깊게 작용한다. 유연함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 강하고 명확함을 느낄 수 있다.

최명애의 작업은 자연을 통해서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는 인류에게 먹을거리, 생명, 위로와 기쁨을 더는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과 연결되는 사람과 사람 사는 세상을 본인의 작업으로 어떻게 끌어넣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작업을 하는 작가 스스로와 그림을 보는 사람을 치유하고자 하는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 이것은 평범하고 보편적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또 하나의 목적이다. 정원과 교감으로 유발하는 작가의 사유는 끝없이 반복된다. 때로는 동양 사상과 연결되는 사유의 흔적들을 작업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릴 때의 붓의 움직임 즉, 운필법은 동양화의 화론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붓으로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색칠과 더불어 붓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필력이 그대로 화면에 반영되고 그림에서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색은 다시 빛과 어우러져 구름, 산, 돌, 꽃, 나무, 벌레, 새 등 사물들을 표현하는 응물상형(應物象形)을 반영하고 그 기본은 붓의 움직임과 기운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최근 작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 중의 하나가 원형의 연결성이다. 무엇인가의 뭉치 같기도 하고, 꽃 혹은 꽃봉오리 같기도 한 크고 작은 형태의 원형은 화면 위에서 연결성과 묘한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원형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다. 꽃이기도 하고, 생명을 품은 씨앗이기도 하고, 해 또는 달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추상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상징적인 의미로 존재함과 동시에 작가와 자연과 정원과 개념의 원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작가 최명애에게 정원은 무슨 의미일까? 캔버스 위에 들추어내지 못했던 감정과 영감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열린 공간, 나무를 보고 꽃향기를 맡으며 화초잎을 만지며 손끝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창작의 욕구를 누르고 담아 둘 수 있었던 공간이 정원이리라 짐작한다. 이제야 하나하나를 꺼내 마음껏 펼치려는 신자연주의는 또 다른 정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짝이는 햇살과 그 사이를 누비는 바람으로 생명의 충만함을 담아왔다면, 신자연주의 작가가 완성해 나가는 정원은 붓끝에서 살아나는 색채와 선과 면으로 오랜 세월을 꿈꾸어 왔던 환상적인 정원으로 완성된다. 상상과 현실을 오가는 두 정원 사이에서 작가가 꿈꾸는 판타지는 현실이 된다.

2023
정종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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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된 신자연주의의 귀환


작가 최명애의 이번 전시는 작가로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 1990년, 작가는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다. 어두운 들판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 질주하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자세로 긴장감을 던져주고, 가로 세로의 직선적 붓 놀림에서 나타나는 추상성은 상대적인 안정감을 더해 강한 정체성이 드러나는 작품들이었다. 작업을 하기 위한 작가 노트에서 볼 수 있는 시기별 고민의 글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불안정한 사회적 정치적 기류가 대세였던 당시의 일상의 형상성을 반영한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평론가 서성록은 그녀의 개인전 비평문에서 작가가 스스로가 낭만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이며 감정환기적이라는 세 가지 성향에 대해 해석하였다.

“간략화된 필치로 부호화된 등장인물을 서정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이고, 서술적이지 않으면서도 구체적 사실을 문제 삼고 있다는 태도 면에서 표현주의적이며, 끝으로 색깔과 구도의 자유로움을 꾀하는 측면에서 보면 다분히 감정환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 자연의 숲을 그리는 작가로 돌아왔다. 자연에 대한 예증적재현 방식으로 본질적인 탐구를 통해 나만의 숲이 아닌 너와 나의 숲을 그리는 작가로 다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이 완전히 다른 성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내재된 조형적인 맥락에서 공통적인 성향을 이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위에서 이야기한 작가의 성향에 대한 세 가지 요소가 현재의 작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달리는 사람 대신 자연의 숲이 주제로 등장하고 있고 나무와 풀 또는 꽃에 대한 사유에 과감한 생략기법으로 서사적 접근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성향이 그대로 살아있다. 숲의 요소 하나하나에 구체적이지 않으면서 숲의 일부 또는 전체를 화면에 과감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수직과 수평적인 대담한 구도와 필치를 볼 때 이 또한 표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자연주의 성향의 작가 작업방식이 생각과 감정보다 몸으로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감정환기적 성향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들은 작업 의욕을 억누르고 있었던 지난 30여 년의 시간 동안 망각상태가 아닌 예술적 행위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잠시 유예되고 닫혀 있었을 뿐 작업에 대한 기를 발산할 준비가 기저에 내재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업에서 공통적인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달리는 사람들> 시리즈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기하학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의 표현이 현재의 작업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제인 달리는 사람들과 어두운 색감, 이들은 분명 현재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나무, 풀, 꽃 그리고 밝고 화려한 색감들과는 분명 완전히 다른 작업의 성향이다. 그러나 작업 속에 일부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수직과 수평의 과감한 운필, 화면에 대담하게 등장시킨 추상적인 요소들은 긴 세월 동안 내재된 작가의 조형적 성향이 현재의 작업에서 재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에 이르러 그녀의 작업방식은 신자연주의적 탐구에서 시작한다. 신자연주의는 인간의 본능에서 생성되는 욕망과 인식들이 극히 개인의 관점에 근원을 두고 있다. 생각과 감정이 앞서지 않고 몸이 움직이는 것에서 재현되고 발현되는 것이 신자연주의의 기본개념이다. 그러기에 개인의 특성이 중심이 되고 자기중심의 주체적 성향을 이룬다. 이렇듯 작가 최명애는 스스로의 몸에서 느끼고 발현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자주 오르내리는 관악산의 숲에서 보이는 나무와 바위와 꽃이 작업으로 나타난다. 숲을 형성하고 있는 나무와 풀의 원초적인 형태와 질감들을 가감 없이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한다. 아침에 산에 오를 때는 아침을 그리고 맑은 날에는 맑은 날의 기억을 담은 숲을 캔버스에 쏟아낸다. 숲이 가지는 친근감과 생명력에 대한 기억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은 현장 사생의 서양적 방식과는 다른 동양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통해 재구성한 완벽하게 자기화한 표현이다. 화면 위에 그린다는 것은 개인의 필체처럼 그냥 드러나는 기질의 일부로써 자동기술적으로 쏟아 붓고 다시 화면 속에서 재구성하고 조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신자연주의로서 작가의 작업은 몇 가지 특성을 감지할 수 있다. 첫째는 구상성에 내포되어있는 추상성이다. 특유의 운필법으로 구사해 내고 있는 선과 색의 균형은 몸으로 담아내는 숲에 대한 구상적 표현방식임에도 추상성을 보이고 있다. 나무를 그리고 꽃을 그리되 형태와 선에서 자유분방한 추상적 성향의 표현 방식에는 시어와 같이 압축되어 있고 음악처럼 추상적인 감성이 담겨있다. 이러한 요소의 바리에이션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정착돼간다. 둘째는 공간감이다. 자연의 숲임에도 그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공간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한의 공간과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유한의 공간을 넘나든다. 셋째는 절제된 색감이다. 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색은 절제된 사용법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감성으로 다가서게 한다. 특히 화면의 세로 또는 가로로 놓이는 과감한 구도임에도 부담 없이 전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색감의 균형에서 나온다.

삶과 숲과 작업이 밀착되는 작업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작품은 완성단계에 이른다.언젠가는 붓을 다시 잡으리라는 표출되지 못했던 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지금, 긴장되고 조금의 두려움이 함께하는 공간에서 생각과 감성보다는 자연의 숲과 마주하는 몸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이데아를 가진 신념의 사람이기보다는 변화하는 개인사를 주제 삼아 그에 따른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내 스스로가 숲을 보고 나의 작업을 이어가지만, 그녀가 그리는 작업은 작가만의 숲이 아닌 너와 나의 숲이다. 자연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작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이 나와 내 주위의 모든 사람으로 확대되기를 원한다.

과거의 작업에는 도덕성과 유미주의적 논쟁에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고민한 적도 있었고, 그 의미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요즘 나와 남의 가슴을 뛰게 하는 숲을 그리기 위해 매일 선과 색을 긋고 칠한다고, 그렇게 그린 내 그림은 삶의 시적 표현이라고 고백한다.

2022
정종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