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필 Chae Sung-Pil
평론글
대지적 사유와 자연, 그 모태로의 회귀
윤진섭(미술평론가)


I.
한국미술의 세계화는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주도한 세계화 전략에 대해 ‘뉴스위크(The Newsweek)’와 ‘타임(TIME)’을 비롯한 저명한 해외 언론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세계의 이목이 한국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화 전략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끈 1970년대의 산업화 시기에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7년 7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Coming!)”라는 제목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이른바 ‘100억불 수출’의 목표가 달성되면서 한국의 경제는 세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이 주도한 반도체 산업은 한국의 세계화를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한국은 한낱 변방의 작은 국가가 아니다. ‘G7 회의’에 한국의 대통령이 초청을 받고, 세계무역 규모 10위권에 드는 세계 경제의 주도국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은 과연 어떠한가? 익히 알다시피 대중음악 분야의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하여 영화의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등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가 세계를 뒤덮을 만큼 급성장을 했다. 한류가 이끄는 이러한 현상은 문화예술이 지닌 고부가가치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다다익선(多多益善), 즉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이왕 내친 김에 더 세게 밀어붙여라, 예술이 체육처럼 승부가 분명히 나는 것은 아니지만, 군불을 때는 것처럼 은근히 스미면서 세계인의 감각에 호소하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II.
채성필은 이제까지 그가 일군 예술적 성과만으로도 세계인의 미적 감성을 녹일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재능을 겸비한 작가이다. 천연의 흙을 재료로 사용하는 그의 작업은 최근 들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단색화(Dansaekhwa)’의 열풍에 힘입어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내가 그의 작업을 이렇게 보는 이유는 재료와 캔버스를 다루는 ‘채성필 고유의 방식’에 있다. 즉, “그는 어떻게 해서 안료를 얻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그는 캔버스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가?”와 같은 예술철학적 질문들과 연관돼 있다.
우선 채성필이 즐겨 다루는 재료를 살펴보자. 채성필은 흙 내지는 다양한 광물질로 된 천연재료를 안료로 사용한다. 흙을 비롯한 다양한 성질의 광물질에 대한 채성필의 연구는 그의 작품을 독창적이며, 내구성이 있는 고유의 영역에 속하도록 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수간(手干) 채색법에 바탕을 두고 천연의 자연 물질을 정제하여 안료를 제조하는 기술을 익히고 그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1). 채성필의 작업이 장인정신을 초월한 지성의 바탕에 서 있는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점이 그를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차별화시키는 지점이며, 서구의미니멀 아트와도 구분되는 특장(特長)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채성필은 진주를 곱게 갈아 만든 은분(銀粉)을 캔버스 바탕에 여러 번 칠한다. 그 다음에 그는 맑게 걸러 정제시킨 진흙 물을 덧칠한다. 이때 타이밍이 매우 중요한데, 그는 흙물이 마르기 전에 캔버스를 작업실 바닥에 눕혀 놓고 흙물이나 먹물을 뿌리면서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물로 물길을 터 나간다. 작업을 하는 채성필의 모습은 드리핑을 하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동작보다 훨씬 더 보폭이 커 보인다. 깡통에 든 물감을 붓에 묻혀 뿌리거나, 아니면 깡통 밑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어 물감을 흘리는 폴록의 소극적인 동작이 아니라, 숫제 빗자루처럼 생긴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뿌리거나 마치 세차장에서 보는 것처럼 거센 물살이 뿜어져 나오는 호스를 손에 쥐고 캔버스 위를 훓는 채성필의 동작은 마치 한 편의 퍼포먼스를 보는 듯 하다. 물감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장화를 신고 작업실을 누비는 채성필의 모습은 완전한 몰입 그 자체이다. 안료와 흙, 캔버스, 그리고 물이 신체를 매개로 혼연일체가 된 상태, 그런 가운데서도 정신을 놓지 않고 대상과 의식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캔버스 위에 물길을 만들어가는 채성필의 제작 방식은 잭슨 폴록 류의 자동기술법이 아닌, 의식의 통제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즉, 채성필이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캔버스를 양 손에 들고 물길의 흐름을 유도할 때, 캔버스의 뒤에 서 있는 그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 수 없다. 채성필은 손에 쥔 캔버스의 위치를 상하좌우로 바꿔가면서 물길을 내게 되는데 이때 그는 단지 예측만 할 뿐이지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는 없다. 그는 화면의 앞에서 그리는 전통적인 회화 제작방식에서 벗어나 캔버스의 뒷면에 주목함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기존의 관례를 전복시킨다. “500호에 달하는 그림을 손에 들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고 말하는 채성필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작가이다.

III.
한마디로 유장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채성필의 작업은 자연의 거울로서의 속성을 지닌다. 자연은 채성필 작업의 모태이며, 그의 작업은 끊임없이 자연을 향해 나아가는, 모태에의 귀의 의식(歸依儀式)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연을 가리켜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채성필은 일찍이 학업 때문에 어머니의 품을 떠난 이후, 객지 생활을 하면서 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채성필에게 있어서 흙이라고 하는 재료가 지닌 의미가 절대적인 이유이다. 어머니의 분신으로서의 흙2)은 그러나 생물학적 모태에서 떠나 우주로의 긴 여행을 떠난다. 어머니에서 흙으로, 흙에서 다시 우주로 향하는 채성필의 긴 여정은 다름 아닌 ‘보편적 미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은 동양철학의 근간인 음양(陰陽)의 세계에 터 잡고 있다. 동양철학은 여기에 오행, 즉 물(水),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가 더해져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우주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캔버스의 중앙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돌리면서(혹은 돌아다니면서) 제작하는 채성필의 작업은 우주의 축소판인 동시에 우주에 대한 유비(analogy) 이다.3)
얼핏 보기에 채성필의 그림은 다양한 지각변동을 연상시킨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이 현상적이기 때문이다. 즉 지구의 어떤 현상을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땅이 갈라지거나, 솟구치거나, 가라앉거나 하는 따위의, 지질학적 용어를 빌려야 설명할 수 있는 듯한 채성필 그림의 표면이 지닌 양태는 대지의 살결을 둘러싼 다양한 드라마이다.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줄줄이 흘러내리듯, 혹은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내려 물줄기를 이루듯, 혹은 오랜 가뭄에 땅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듯, 채성필 그림의 피부는 대지적 비유로 가득 차 있다. 대지에 동서의 차이가 있는가. 서양의 대지는 동양의 대지보다 더 거친가? 결코 그렇지 않다. 대지는 서양이건 동양이건 지역을 막론하고 다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채성필이 바라는 지점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리라. 동양과 서양을 두루 관통할 수있는 미의 세계, 그 보편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과 작가로서의 존재 이유, 그림을 통해 동양과 서양이 소통할 수 있다는 작가적 신념 등등이 현재 동서양을 오가며 국제적 활동을 하는 채성필의 의식을 관류하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경계’의 지점일 것이다.

IV.
채성필의 작품은 대지를 품은 우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단색으로 거침없이 그린 그의 그림들은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기상의 변화와 그로 인해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펼치는 드라마에 대한 시각적 은유다. 채성필은 거대한 캔버스에 갈색의 흙물이나 청색, 녹색 등등 흙에서 채취한 고유의 색물을 부은 뒤, 특수하게 고안한, 싸리비처럼 생긴 커다란 붓으로 쓸어내거나 물을 부으면서 자연스런 우연의 효과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행위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 화면은 거듭 이야기하거나와 지극히 ‘대지적’이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풍경처럼 아늑하고 근원적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채성필에게 있어서 ‘기운생동(氣運生動)’은 오래 전부터 내면화된 회화의 작동 원리이다. 몰입은 작가의 기운을 추동시켜 화면을 생동감 있는 세계로 만든다. 채성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림의 세부적인 효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붓과 물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택하는 일이며, 그 뒤의 일은 우연에 맡긴다. 그리하여 나타난 결과는 과연 어떠한가? 나는 앞에서 채성필의 그림을 자연이 펼치는 드라마에 비유하였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자연의 드라마이기도 하면서 ‘희로애락애오욕’으로 대변되는 인간 칠정(七情)의 드라마인 것이다. 거기에는 순경(順境)이 있고 역경(逆境)이 있으며, 호방함이 있는가 하면 잘게 부서지는 파편들이 내는 순간의 파열음과 흙물이 사방에 튀면서 대지를 적실 때의 장쾌함이 있다.
채성필은 자신의 화의(畫意)를 그림 속에 드러내기 위해 때로 신체적 개입을 한다. 캔버스를 양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물길을 터서 색물 스스로가 그림을 그리게 한다. 즉, 최소한 의 개입인 것이다. 그 모습이 자연을 닮았다.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라는 뜻의 자연.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고 단단한 돌도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흙이 되지 않던가. 음양오행의 원리에 바탕을 둔 채성필의 그림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인간의 대지적, 나아가서는 우주적 사건의 이해에도 많은 통찰의 계기를 가져다 준다4).

V. 이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동아시아의 한구석에 있는 변방이 아니다.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문화예술이 힘차게 약진하고 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세계는 한국을 새롭게 바라본다. 음악, 영화, 체육의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 성가를 누리는 유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물론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미술 분야에서도 다수의 국제적 작가들이 나왔다.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는 채성필은 굳이 단색화 열풍에 대해 언급하지 않더라도 탁월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1) 천연재료에 대한 채성필의 전문지식 습득은 본인의 연구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의 은사 이종상 화백의 영향도 컸다. 알다시피 일랑(一浪) 이종상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비롯한 각종 벽화연구와 채색화 재료에 관한 전문가이며, 많은 수의 대형벽화를 제작한 작가이기도 하다.
2)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있어서 대지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대지는 ‘고수레’ 의식에서 보듯이, 공경과 경배의 대상이다. 흙이 곧 대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채성필의 작업은 문화적 동질성과 원형성을 찾아가는 기나 긴 여정이다. 채성필의 작업은 그런 이유에서 시각중심적 문화의 끝물인 서양의 미니멀 아트(Minimal Art)와는 성격이 다르다.
3) 채성필의 그림은 사실 상하좌우로 바꿔걸어도 되는 유형의 작품이다. 이 점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에 고정된 위치가 없다는 사실과 상통하는 문제이다. 위치를 정하는 것은 인간의 시선이며, 자연에는 고정된 방위가 없다.
4) 채성필의 어떤 그림에서는 ‘사람 인(人)’자 형상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



흙으로부터 보이는 세상까지


몇 년 전부터 채성필의 작품은 자연 속 형상들의 근원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괄적 의미의 한 단어를 찾는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흙’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채성필에게 있어, 흙은 모델이자 작업의 원천이다.
작품제작의 방법적 기본은 자연자체의 생산 방식에서 유추해 내는 ‘회화적 poïétique’ 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작업은 자연, 혹은 고국에 대한 회귀적 감상을 지닌 여행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여행 중 채집한 ‘흙’은 감상적 모티브를 포함한 마티에르로 사용되고, 이 ‘흙’이라는 마티에르는 ‘흙의 공간-이미지, 주제’을 표현하는 직접적 도구가 된다.
흙은 그가 "근원적 공간"이라고 이름 붙인 한 공간을 창조하게 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땅을 생겨나게 하고, 산수를 생겨나게 하고, 근본적인 풍요로움의 영역을 생겨나게 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흙은 하나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특히 하나의 원형(原型)이며 독특한 미학을 전개하는 재료이기도 하다……

…… 그의 작업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마티에르는 ‘물’이라 할 수 있다. ‘물’과 ‘흙’은 그 상호 원소적 배합 또는 이질적 성질을 통해, 그가 즐겨 사용하는 ‘흘려지게 하기’, ‘그려지게 하기’라는 마술 같은 테크닉을 완성시킨다. 이 원소적 특성은 그가 말하는 ‘상징’과 ‘본질’, 즉, 근원을 형성하는 동양의 오행 또는 서구의 4원소론과 함께 그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는 대목이며, 동양 전통미학과 서구적 조형론이 결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드러나는 이미지들(들판의 풍경들,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등)을 보고는, 조금 가까이 들여다 보면, 그의 화면 위에는 어떤 인위적이거나 모방적 외형을 지닌 형상도 존재하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화면에 존재하는 것들은 ‘흙’과 ‘물’이 자연히 만들어내는 흔적들이며, 그렇게 ‘그려진 것들’이다. 근원소적 물질들을 이용한 자연 그대로의 창조된 이미지이다. 단지 그 형상이 우리의 인식 안에 자연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나무가 되고, 들판이 되며, 물결치는 바다가 되고, 바람에 이는 대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외형의 관찰 속에서가 아닌 형태를 우발하는 방법 속에서, 서양의 현대성은 동양의 미학적 전통과 만난다. 이것은 한 공간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그리고, 동서양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만남이다. 자연이 천천히 활동하는 긴 시간, 지질학적 시간 그리고 움직임을 포착하는 순간 등이 서로 교차하며, 자연현상의 순환적 귀환(반복)들도 이에 포함된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화면안에서 근원과 본질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조형예술학교수 / 미술평론가> Anne KERDRA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