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굿맨 평론
닥종이로 감싼 수백 개의 개별 요소로 완성된 전광영의 추상적 구성은 서구와 아시아 예술 간의 틈새를 멋지게 이어 준다. 일반적 양식의 구상미술에서 동서양의 관점이 만나기란 예 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가장 최근 들어 여러 세대에 걸쳐 전통적 인 유화에 대한 큰 관심을 지켜본 바로는, 모든 곳 가운데 중국 본토의 예술가들이 매체뿐 아니라, 서구적으로 보이는 리얼리즘을 표현하려는 시도에 푹 빠졌다. 이제는 아시아 예술 가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추상 표현에 참여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추상 표현은 서구 모 더니즘과 함께 시작했지만,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여기에는 추상 훈련이 위대한 공감 및 기 교와 함께 이뤄지는 아시아도 포함된다. 전광영의 예술은 3~4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서구 문화를 끌어안지만, 서울에 기반을 둔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아시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전광영의 예술을 구성하는 재료인 뽕나무 잎은 그의 자전적 일대기 와 관련이 있다. 뽕나무 잎은 전광영 가족이 운영하던 약방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그의 어릴 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전광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점은 추상적 이면서 때때로 기하학적인 형태로 작품을 만들려는 그의 결정이다. 그 형태는 서양의 비구 상적인 시각 문화에 대한 현재 진행형의 지식을 반영한다.
전광영은 미국을 여러차례 방문했기 때문에 뉴욕과 같은 예술의 중심지에서는 아주 일상적 인 추상 표현에 익숙하다. 이곳의 예술계가 전광영의 작품에 강한 관심을 피력했다. 이 작 품들에는 그가 고안한 각각의 조각 작품을 이루는 무수한 구성 요소를 일컫는 말인 '집합 (Aggregates)'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한다. 다양한 색채와 모양을 갖는 전광영의 낮은 양감 (Low reliefs)은 회화와 아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낮은 양감과 직사각형 모양, 갤러리 또는 박물관 벽에 그림처럼 걸리는 밀착감 등을 특징으로 봤을 때, 기타 작품들은 한층 더 조각품 같다. 덜 선명한 색조의 평평한 면에서 파낸, 밝은 색깔의 둥근 수조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전광영 스타일에서 보이는 진정한 재능은 믿기 어려운 표면 처리로, 작품 외부와 그 외부의 복잡다난한 부분을 가로지르는 변화무쌍한 시선이 특징이다. 이 추상의 파사드(표면)는 어 떤 면에서 20세기 미국의 비구상화와 관련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은 이미 인정받 은 아시아의 추상 표현, 특히 작품의 텍스처와 마무리를 강조하는 경향을 띠는 한국적 표현 과 연관이 있다. 전광영의 주목할 만한 창의적 노력이 드러나도록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무 엇이든 간에, 전광영 자신의 고유한 발명품이고, 서양이나 한국의 어느 곳, 어느 누구의 작 품과도 닮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개인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아시 아 예술을 우아하게 승화시킨 것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작품은 멋지게 자기 역할을 해내어 눈에 띄는 전시가 되었다.
전 세계 예술가들끼리 주고받은 특별한 강렬함과 수많은 문화 정보를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서로 간에 차용한다는 말은 상식이 되었다. 즉, 예술은 더 이상 지역이나 문화로 쉽게 구별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큐레이터가 논평했듯이, 더 이상 아프리카 예술은 없 고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예술만 있을 뿐이다. 전광영의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한국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고, 그저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관람자로서 우리는 문화적 편견 에 빠지지 않는다. 그 편견으로 문화적 경계선이 고정되면 작품이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 세계에서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예술 세계에서는 작품 양식을 서로 맞 바꿀 수 있고, 기원이 어디인지 따지지 않는다. 대신, 전광영의 작품 속에서 수없이 맞물리 는 요소들은 현재 예술 세계를 구성하는 개별 스타일과 사람들을 걸출한 모자이크 방식으로 언급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전광영의 '집합(Aggregations)'은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진 것이 아닐지도 모르나, 우리 시대의 시각적 환경을 아주 근사하게 보여 주는 방법으로 여기는 것은 흥미롭다.
공식적으로 그의 작품은 손으로 빚어낸 절묘한 솜씨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조각품들은 때때 로 생물학적 형태를 옹호한다. 세포와 바이러스의 밝은 색조는 실제 과학에서 발견된 표본 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전광영은 자신의 추상이 얼마나 비구상으로 보이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추상(실제로는 예술 추상 전부)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완전히 부 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리얼리즘과 비구상 예술 간의 경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빈틈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전광영 작품의 생물학적 틀과 암시가 작품에 대한 우리의 첫인상을 바꾸지 는 않는다. 즉, 이 작품은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추상이라고 스스로 결정을 내 리면서 예술이 되었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문화적 구성물로, 바깥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힘을 얻는 것이 당연하다. 추상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전광 영은 스스로 만든 표현 방식을 종합적으로 포함하려 노력하기에 그 고유한 특성을 즉각적으 로 알아차릴 만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상적인 형태를 표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말이 다. 예상한 대로, 사실성과 추상적 대조 간에는 긴장, 심지어는 모순이 있지만, 전광영의 조 각품에는 이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대신 작은 형태를 모아 전체 구성을 발전시킨 표현 방식을 볼 수 있다. 작은 형태를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 흥미롭고 그 자체가 드러난다.
전광영의 모든 작품이 갖는 중요한 다른 일면은 기교에 대한 끈질김이다. 현재 미국의 예 술 세계는 합리성과 정치성을 띤다. 일반적인 관행이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거 나, 이해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전광영의 조각품들에 보이는 기교는 암시 면에서 전통적 이지도, 장식적이지도 않지만 그의 작품 구조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 현대미술에 서 기술적인 기법은 대개 이목을 끄는 데 중요한 부분이고, 전광영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럴지라도, 전광영이 기교적이기만 한 표현 방식으로 옮겨 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집합 (Aggregations)> 연작의 힘은 일반적인 지능, 즉 형태의 독자성뿐 아니라, 복잡성을 위한 단 순성의 거부와 관련이 있다. 작품들을 한 그룹으로 다 같이 미술관에서 전시함에 따라, 흰색 정육면체 모양의 중립적인 공간이 마법적인 곳으로 바뀐다. 이곳에서 조각품들은 예술의 공 식적인 가능성에 대한 토론의 주제가 된다. 기교는 전광영이 대화를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재료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의 내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 는 이상적인 비전을 드러내는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 드러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추상과 구상, 지성과 감성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모순으로 인해 작품은 모양을 바꾼 다. 그야말로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는, 게다가 그 온전성이 존경스러운 하나의 전체로 모양 을 바꾸는 것이다. 조나단 굿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