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웅필 Byen Ung Pil
한 사람으로서 세상 앞에 서기
모노톤의 배경에 터럭 없이 벌거벗은 한 인물의 초상. 눈을 반쯤 감은 인물이 다른 그림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내 한 사람의 초상화임을 짐작하고, 제목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작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하지만 으레 표정이라고 짐작할만한 단서들, 이를 테면 웃음, 슬픔, 분노, 짜증 등 감정을 동반한 얼굴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은 온데 간데 없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손으로 잡아 비뚤어진 입이나 손가락으로 늘어뜨린 입술, 코와 뺨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다. 그나마 온전히 얼굴을 볼 수 있겠거니 기대하며 다른 그림들로 고개를 돌리면, 그림 속의 그는 이내 갖가지 사물들을 화면 중앙에 버젓이 등장시켜 얼굴을 가리는 통에 그를 온전하게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손가락으로 살과 근육을 비틀어 일그러진 얼굴을 만들고 때론 사물 뒤에 가려진 채, 하나의 인물로 온연히 인식되길 거부하면서 보는 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자화상. 변웅필은 자화상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인물화와 드로잉 연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 탐구에서 비롯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문제를 이야기 한다.



인식에의 거부, 행위의 개입

변웅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연작은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물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을 대할 때면, 관객은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나 자세, 입고 있는 의복이나 주위의 기물들 , 인물이 위치한 배경이나 상황을 통해 그를 해석하거나 판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웅필이 그려내고 있는 자화상에서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어서 기존의 초상화의 범주에서 행해질 법한 해석의 잣대들을 교묘하게 피해나간다. 이를 위해 작가가 택한 방식은 자신이 직접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보는 이의 해석을 거부하는 일련의 퍼포먼스의 개입이다. 즉, 행위적인 속성을 작품에 적극 끌어들여 지금 화면 속에 보고 있는 인물에 대해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한 인물과 순전히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독일 유학시절 현지인의 외모와 다르다는 이유에서 비롯된 선입견의 문제가 지금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방식은 한 인물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지각에서 비롯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던 작가가 선택한 나름의 재치있고 현명한 대처법이라 하겠다. 주변의 사물을 의도적으로 화면에 등장시킨 이유도 단지 조형적인 요소로서의 선택이었을 뿐, 그 의도는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일그러진 얼굴 앞에 유보된 판단

변웅필의 그림은 존재의 온전한 모습을 좀처럼 쉬이 내어주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행위의 결과로 인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왜곡된 신체의 일그러진 형상이다 .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인물의 얼굴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그림은 감상과 해석의 대상임을 고려할 때, 여기서 변웅필의 회화가 인물화, 특히 자화상이라는 영역에서 독자성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물을 대하는 관객의 지각과 인식체계를 고려에 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내지만, 이러한 형상의 왜곡과 변형의 방법론을 택하는 와중에도 그의 그림은 인간의 얼굴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할만한 구상적 표현의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이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자, 본인 역시 언제 어디서나 가장 손쉽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인물, 특히 자신의 얼굴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에 행위적 속성이 가미된 왜곡과 변형이라는 방법론을 취하여 관객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때 화면 속에서 온연한 인물의 형상을 찾고자 하는 관객의 욕망은 의도적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대면할 때 더욱 극대화된다. 그의 그림은 초상화에서의 인물표현이 지킬법한 규칙들을 어김없이 빗겨가면서, 이유없이 뒤틀린 얼굴을 관객의 눈앞에 들이밀어 화면 속 인물의 실재 모습에 대한 관객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보이는 대상으로서 얼굴의 형태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도전을 받고, 그것을 통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차단되었을 때 부딪히게 되는 인식과 판단에의 도전. 결국 작가는 인간에게 있어 온연한 하나의 진실된 모습은 없으며, 인간 개개인의 경험과 판단에 아슬아슬하게 의존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인물의 모습을 판단하여 바라볼 뿐임을 작업을 통해 암시한다. 인식 가능한 형태 안에서의 변형을 유도한다는 점, 즉 구상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물 ’이라는 소재를 택하여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해석적 여지를 남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인물화에 대한 관념의 울타리에서 온전히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자화상이라는 점이 변웅필의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하나의 큰 축이다.



만들어진 인물, 만드는 그림

인간에 대한 단면적인 인식을 거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변형 , 왜곡하여 얻은 , 혹은 ‘만들어진 ’ 인물의 얼굴은 그가 유화작업을 행하는 방식과도 많이 닮아 있다. 가로방향으로 짧고 규칙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면서 인물의 모습을 완성해나가는 그의 붓질법은 마치 베틀로 옷감을 짜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일전에 그의 유화 연작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에 대한 작업노트에서 그림을 ‘그린다 ’는 표현보다 ‘만든다 ’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덧칠없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칠과 칠 사이를 직조하듯 순차적으로 이어 붙여 내려가는 붓터치 방식은 얼굴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일종의 행위적 속성과 맞물려, 소위 ‘만드는 ’ 그림이라는 작가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축해나간다.



한 사람으로서 세상 앞에 서기

작가가 인물을 그림의 주요 소재로 선택한 이유 , 그것을 전달하고자 택한 방법과 나름의 기법 , 이 모두는 그의 그림 속 인물이 하나의 특정한 인물을 넘어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 사유되기를 바랐던 것에서 비롯된 결과로 보인다 . 스스로가 그림의 주인공이지만 확고한 판단을 거부하고 , 일련의 왜곡과 변형의 행위를 통해 일정한 거리두기를 자처하는 일 . 그럼으로써 결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는 일이 없이 그림을 마주한 이에게 지금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인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 . 관객이 바라보고 있는 인물 역시 작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얼굴을 지닌 한 사람일 뿐이며 , 이를 통해 인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 또한 결국 관객의 경험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의식일 뿐이라는 사실 . 그리고 결국 이러한 사실들로 하여금 인간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문제를 환기시켜 그림 속의 인물이 결국 작가의 자화상을 넘어 개개인의 자화상이 될 수 있지 않는가를 넌지시 묻는 일 . 아마도 작가는 그의 그림 안에서 손가락 사이나 사물 뒤에 숨은 채 , 그림 앞에 서있는 이들에게 작가 자신에 대한 생각 , 즉 한 사람으로서 세상 앞에 서 있는 존재에 대한 생각 , 그리고 그에 대한 관객의 생각에 대해 슬며시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사유를 담은 몸짓, 이야기를 담은 여백

단순화된 화면과 구도 안에서 최소한의 행위가 개입된 왜곡과 변형의 방법으로 특정 인물을 하나의 객관화된 낯선 대상으로 전이시키는 전략은 그의 회화의 모태가 되는 일련의 드로잉 연작에서도 여전히 유지된다 .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과 판단의 문제가 작가의 자화상에 집중되어 나타난 것이라면 <무제 >라는 타이틀로 선보이는 드로잉 연작은 이러한 주제의식이 인물 간의 관계 속에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자화상으로 명명되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작가가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표현했다면 , 두 , 세 명의 인물들이 말없이 절제된 몸짓과 손짓으로 하얀 여백 안에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드로잉 작업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인간 간의 관계를 통해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사각형의 새하얀 종이 안에서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듯한 인물들은 사실 특정한 모델이나 상황설정 없이 작가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사람들이다 . 아마도 이는 자화상에서 보여주었던 작가의 모습이 더욱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로 나타난 작가 자신의 현현 (顯現 )일 것이다 . 하나의 인물이 알 수 없는 동작과 손짓으로 화면 속에 나타나면 , 그에 대한 반작용인양 또 한 명의 인물이 새로운 선과 색을 입고 남은 여백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다 . 작가는 인물 간의 손짓 , 몸짓 , 그리고 인물과 하얀 여백이 만들어내는 공간 사이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무제로 시작한 그림에 부제를 붙인다 . 이 때 인물들 간에 우연히 만들어진 동작의 조합이나 그들 사이에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여백은 화면 속에 네러티브를 더욱 극대화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 이러한 인물드로잉은 작가가 1997 년부터 지금까지 일기처럼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작업이며 , 2002 년부터 시작된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뿐만 아니라 작가가 유화로 그린 드로잉으로 일컫는 일련의 유화드로잉 연작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 어쩌면 그에게 있어 드로잉은 작가적 성찰의 시작이며 여기서 파생되는 모든 시표현의 언어들은 그것의 결과이자 실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최근에 작가는 드로잉과 유화 , 드로잉과 설치 간의 장르적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 중에 이러한 인물드로잉을 합판을 이용한 등신대의 인물 설치 작업으로 확장시키는 조형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 공간의 여백 속에 자아를 투사한 인물들을 위치시키고 관계를 만들어 이야기를 탄생시켜 주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간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눈여겨볼만하다 .



이처럼 변웅필은 최소한의 형태와 조건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사유의 깊이와 폭을 만들어나간다 . 이는 인간의 인식과 판단에 관한 작가적 성찰을 바탕으로 , 인간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양한 형태로 탐구해온 결과다 . 아마도 그가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이란 어느 누구의 판단으로도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며 , 단지 세상을 통해 단편적으로 수집된 인상과 그로 인한 관념들의 복합적인 합의를 통해서만 간신히 이해의 틈새를 허락하는 존재가 아닐까 . 그래서인지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드로잉을 통해 인간을 성찰하고 다양한 조형적 실험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는 일은 그에게 있어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 지금의 그가 확장된 개념의 인물 드로잉을 연구하고 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는 사유의 여러 형태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 그의 회화세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내심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 황정인 (독립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