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열 Oh Se-Yeol
기억의 층위
화면은 모노톤의 전면화이거나 때로 두 면으로 구성되어 진다. 대단히 단조로우면서도 풍부한 암시로 덮여 있다. 조용하면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기운으로 화면은 더없이 푸근한 느낌을 준다. 이미지들은 가로지르는 선조(線條) 속에 명멸한다. 일정한 선조는 잘 구획된 초여름 날 못자리처럼 가지런하다. 거기 촘촘히 심어진 모들이 다가올 여름날을, 그리고 잘 익은 벼들로 빼곡히 채워지는 가을을 기다린다. 벼들 사이로 참새가 날아들기도 하고 벼들 사이로 지나는 바람처럼 휘말리는 선의 회오리가 점점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단순한 못자리가 아닐 것이다. 들꽃이, 창문 틀이, 자동차가 숨바꼭질 하듯 떠오르기도 하니 말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어떤 목적 하에 그려진 것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려져야 하는 필연성이나 이미지 사이의 어떤 맥락도 쉽게 간파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지워진 이미지나 가까스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곧 없어질 것만 같은 안쓰러움과 연민을 자아내게 한다. 범속한 사물의 현전은 그러나 무언가 소중하고 오래 간직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작은 꽃송이 하나, 그리다 만 것 같은 새 한 마리, 그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부단히 자맥질 하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난다.

오세열의 화면은 이처럼 무심하고 때로는 지나쳐버린 기억의 갈피들을 우리 앞에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추억의 보따리로서.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사이를 부유하는 이 기억의 갈피들은 고충환의 말처럼 “삶을 의미 있게 해주고 풍요롭게 해주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이 연금술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기억은 세월의 겨가 만드는 일정한 층위(層位)이다. 저 깊은 바닥에서 길어올 리는 샘물처럼 언제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신선하게 만들어주는 보이지 않는 깊이이다.

오세열의 화면은 모노톤에 지배된다. 그런 만큼 평면화가 두드러진다. 화면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흔적들은 이 평면의 질서에 상응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을 가눈다. 평면화가 두드러지면서도 단순한 평면으로 보기엔 중후한 마티에르의 층위가 평면의 구조화로 진행된다. 평면이 단순한 넓이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로서의 구조를 아울러 띤다. 이 점은 일반적인 모노톤의 평면과는 다른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의 경향으로서 등장한 한국의 단색화와 일정한 차별화를 띠는 것도 이 점에서 기인한다.


여기 한 아이가 있다. 모노크롬의 단면을 배경으로 수줍은 듯 서있는 아이의 모습은 어쩐지 안쓰러우면서도 자랑스럽다. 자신의 존재를 소리쳐 알리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기념비적 위상으로 현전(現前)시킨다. 조용하나마 당당하게. 오세열의 세계가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