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건축조각의 공간 드로잉
김병주의 작업은 모두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에는 철 등을 이용해서 용접작업을 하였고, 이후 이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의 작업에서 철은 용접과정을 거쳐 구조적인 형태를 띠고, 공간을 이루는 선은 무수히 반복된다. 무한 반복의 선들은 공간을 이어주는 벽이 되어 건축 공간을 구축한다. 특정 장소를 점유하는 건축물은 기능과 매스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김병주의 ‘건축조각’은 건축가들의 구조물과 달리 투명한 공간을 형성한다. 채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비워지는 공간 사이로 선이 만나면서 추상적이고 구상적인 공간성이 탄생한다. 작가는 철을 용접하면서 구조적인 형태나 공간성을 만들어내는 점에 깊은 관심을 두고, 표화랑에서 개최된 2014년 개인전《Familiar Scene》에서는 익숙하지만 낯선 선(線)구축물을 전시했다. 중첩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보이드(void)’는 흑백필름의 네거티브 공간을 보는 것처럼, 비워지면서 채워지는 김병주 식의 공간 존재론을 생성한다.
조각과 건축의 조우는 역사적으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의 본업은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다. 그는 인체조각을 만들 때 청동과 같은 재료의 물성으로 인간의 정신을 빚어내는 느낌이라고 표현하였다. 금은 세공을 하던 중세의 장인들이 금속의 물성이 변화하는 속성을 보면서 정신성과 물질성이 서로 교우하는 추이를 느끼게 되었던 점과 유사하다. 예술가들은 청동이나 철, 유리 등과 같은 재료를 녹이고 이것들이 일정한 시간을 거쳐 굳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거칠었던 재료들을 본인이 의도하는 형태를 띤 조각물로 변화시킨다. 철의 변화는 물성의 변화를 넘어서 연금술사들의 상상력처럼 단순한 형태변화가 아니라 생각을 담아내는 재료이다. 김병주의 작업에서 철의 물성이 변화하는 과정은 선이 공간을 이뤄내는 과정과 함께 작업 과정에서 주요 개념으로 작용한다.
김병주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시각 장치와 도구들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되었던 투시도법, 원근법 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장치들은 그의 작업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원근법과 투시도법은 정확한 공간성을 구현하기 위해 이용되었지만, 김병주는 역으로 공간의 매스를 부재하는 ‘보이드;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공간의 경계를 드러낸다. 그는 처음에는 도면을 그리다가 이후 캐드를 이용하여, 점차 손이라는 수공에서 레이저 커팅으로 작업과정이 변화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입체감을 부여하는 시각장치들은 2D와 3D의 유희가 끊임없이 작동한다. 아마도 작업의 스케일을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 공간의 정확성을 담보로 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레이저 커팅을 거쳤다 하더라도 수천 개의 퍼즐을 짜 맞추듯이 꼼꼼한 제작과정과 노동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그의 작업은 정확한 공간과 모호한 공간을 이어나가는 끊임없는 여정인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조각언어와 건축언어를 서로 중첩시키는 작가로는 댄 그레이험(Dan Graham),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등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거대한 매스감을 이용하여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물리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인 공간이라고 하는 이유는 관람자들이 공간 안에 들어가서 실제로 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은신처(shelter)’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공간보다는 포지티브 공간의 사용이 이들의 작업에서 두드러진다면, 김병주는 그 반대의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이다. 예를 들면,
이나 부조작업 같이, 김병주의 작업에는 안과 밖이 서로 모호하다. 모호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상보적 관계처럼 선을 지탱하며 유기적인 관계에 있으니 서로 기대는 관계이다. 또한 선으로 구획된 공간 구분이 명확하게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모호한 관계에 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무수한 선, 정확한 선을 따라 공간을 부유하는 우리의 눈은 김병주의 작업에서 뚜렷한 공간을 잡아낼 수가 없다. 모세혈관처럼 뒤엉켜있는 네트워크 같은 구축물은 수많은 망이나 리좀으로 우리를 관통하는 그리드 구조물처럼 보인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빈 공간,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빈 공간에 김병주의 가 있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도시 공간, 세포분열처럼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그 공간 안에 관람자는 ‘부재하는 인간’으로 서 있다.
II. 김병주의 그림자 공간: 공간의 카무플라주(camouflage)
김병주의 작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공간 속에 설치된 였다. 다소 어두운 공간에 여러 개의 높고 낮은 건물들이 설치되는데 묘하게 건물 그림자가 투사되어 컴퓨터에서처럼 인터랙티브 공간을 만들어낸다. ‘열거된, 혹은 나열된 빈 공간’이라 번역할 수 있겠지만, 보이드 구축물은 도심에 부유하는 가건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완성을 기다리는 기초공사를 마친 건물구조처럼 보인다. 미니멀리즘의 유닛들이 반복, 축적되어 있고, 아슬아슬한 수직구조는 언뜻 차가워 보이지만 관람자들은 그림자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처럼 작품 주변을 배회한다. 미니멀리즘 구조 때문에 김병주의 공간 구조는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하나의 틀이 존재해 보인다. 규칙과 질서는 미니멀한 구조의 가장 기본 방식이지만, 관람자들의 움직임은 이 공간을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고층건물을 연상시키는 높은 구축물,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빌라형 건물이나 주차장 건물 등으로 ‘열거할 수 있는’ 나열된 건물들은 그 자체로 텅 빈 공간이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우연적인 것들이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공간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선과 기후의 조건, 그리고 바람의 속도 등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엔트로피를 경험한다. 익숙하면서 낯선 곳이 바로 공간이다. 김병주의 공간 설치작업들은 현대인들이 마주치는 모든 공간의 ‘카무플라주’인 것이다. 이곳은 ‘움직이는 신체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존재한다. ‘위장, 변장’된 공간과 장소로 관람자들이 서 있는 순간, 김병주의 빈 공간은 채워지는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카무플라주’는 변장과 위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동물들이나 전술들을 지칭한다. 김병주의 ‘카무플라주 공간’은 건물 구조가 모두 보이는 투명성을 통해 공간의 실체와 공간 사용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법을 의미한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그의 공간 구축물은 작가의 의도를 밝혀내기 위한 ‘건축조각’을 이용한 위장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건축적’인 유사성을 따른 건축적 조각(architectural sculpture)이 아니라, ‘건축’과 ‘조각’이 같은 등가율로 존재하는 김병주 식의 공간으로, ‘건축조각’에는 비어있는 허(虛)와 아무 것도 없는 무(無)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씨실과 날실의 그리드 구조처럼 유기적으로 존재한다. 모호한 벽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것, 2차원의 방식을 적용하여 3차원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경계에서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 시각성을 중심으로 구축한 공간의 역사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것. 공간을 경험하면서 장소를 느껴가는 것, 그리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엔트로피한 삶의 흔적. 이러한 물리적, 심리적 조건들은 김병주의 근작에서 주요 작동기제로 자리잡고 있다.
정연심 (홍익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