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Park Jong Kyu
순수주의의 옹호와 그것의 파괴를 모두 넘어서
우리는 어차피 우주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자연과학으로도 알 수 없고 인생철학으로도 알 수 없다. 모두 프레임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우주에 다가가는 관점은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보자면 프렉탈일수도 있고 거품 일수도 있다. 그것을 작게 보자면 분자와 미립자를 넘어 종국에는 허무(nothing)로 종결될 수 있다. 자아의 관점의 이동과 그 추이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박종규 작가는 컴퓨터를 주목하게 되었다. 컴퓨터 작업의 본질은 그것이 자아가 만든 산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0과 1이 만들어낸 이진법의 계산체계이다. 이 단순한 나열은 인간의 계산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그 계산 능력이 인간을 초월할 때 인간은 컴퓨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컴퓨터를 살리고 작동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퇴락 가능성을 작가는 일찍부터 예감했다. 그리고 아름다울 정도로 질서정연한 0과 1의 배치로 말미암아 그것은 현상이 된다. 아름다운 화면, 조화로운 소리, 수학적 정답, 정확한 예측결과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0과 1이 만들어낸 모든 계산과 프로그램이 완벽할 수는 없다. 컴퓨터가 계산을 수행하면 할수록 엔트로피도 증가하게 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컴퓨터에 피로가 생기며 노이즈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노이즈라는 불편한 현상을 확대해보면 그것 또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현시된다. 노이즈는 디지털 가상, 즉 픽셀 이미지로 다시 재배치되며 컴퓨터 출력기는 픽셀 이미지를 시트지(紙)라는 물질로 전환시킨다. 컴퓨터 출력기가 정제한 선과 점을 떼고 다시 아크릴 물감을 정교하게 바른다. 그것은 미적 순수주의와 순수주의의 베일을 걷어내려는 혁신주의 두 진영 모두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의 결과물이다.

모더니즘의 미적 순수성과 세계를 바라보는 혁신성을 동시에 구유하고 있는 박종규 작업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기획의 산물이다. 자아라는 전통의 개념을 관점의 이동이라는 용어로 전환시킨다. 모더니즘의 순수주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그 영역에 새로운 에너지를 주입한다. 사유의 존재 구속성이라는 테제를 철저히 지키면서도 이코노클라스트들의 허기를 달래준다. 그것이 박종규 세계의 위대성이다.
이진명, 전 대구미술관 학예실장